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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_Reasonable Doubt 대리

시즌 3x04 Reasonable Doubt @대리 (@darriomens)

- 관리자의 치정사건 –

 

 

“해, 해리!”

이름이 불린 짧은 순간 자신을 이렇게 다정하게 부를 수 있을만한 사람의 몇몇을 머릿속으로 떠올렸지만, 그 중에 대부분은 이 대학에 다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전세계의 수재들을 모아놓은 메사추세츠의 공대에서 적어도 자신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네이슨 잉그램 정도의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 해롤드 핀치는 매끈한 미간을 찡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헐렁한 면바지와 늘어진 가디건의 한 쪽 깃이 어깨에서 흘러내리고 있지만 그것을 올리지도 못하고 자신을 부른 남자를 마주했다. 금발의 전형적인 미국 미남의 이목구비는 뚜렷했고 사랑받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해롤드는 잘생긴 얼굴이라면 이골이 나 있었다. 극심한 난시용 안경때문에 크기가 줄어든 눈이 렌즈 안에서 작게 깜뻑였다. 

“날 불렀어?”

“응, 해롤드.”

정상적인 미국의 하이스쿨을 졸업했다면 열 아홉살이나 먹어서 같은 성별의 남자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짓을 하면 기껏해야 돌아오는 게 저질스러운 욕 뿐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사내아이가 저를 보고 웃었다. 해롤드는 여전히 불쾌함에 가까운 일그러짐을 숨길 줄 몰랐다. 윌 주니어. 친구들이 그를 종종 그렇게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까스로 이름도 아닌 이름이 기억났지만 그 이외에 이 사내에 대해서 아는 것 이라곤 없었다. 물론 해롤드는 당장이라도 낡은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면, 제 앞에 이 남자 직전의 사내아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어떤 산부인과에서 어떤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는지, 성장하면서 앓았던 지병은 무엇이었는지, 이번 학기 장학금 대상에 들어갈만한 석차인지 아닌지까지 알아낼 수 있었지만 해롤드의 관심을 끄는 것은 불행히도 개인의 시시콜콜한 정보가 아니었다. 해롤드는 말하자면 이런 상황을 불편하게 여겼다. 개인간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시점, 상대방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져야 하는 지점. 한꺼번에 엄청난 감정과 정보가 파도처럼 몰려와 카테고리로 정리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강제로 입력되어 버리는  상황.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매력적인 금발을 앞에 두고 핀치가 마저 말을 이었다. 

“난 네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내 이름은-“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그러니 말을 걸지 말라는 경고에 가까웠지만 사내아이는 기꺼이 웃었다. 해롤드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따라 웃었다. 사실 말해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

 

사건이 발생한 시각 20xx년 3월 27일 11시 40분에서 45분사이로 추정.

 

누군가 자신에게 키스했다. 

어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서관에 들러 그동안 썼던 무기를 다시 정리하기 위해 들어갔을 때의 시간이었다. 오후에 라이오넬에게 가해자였던 번호를 인계함과 동시에 핀치에게 사건의 마무리를 알렸고, 핀치는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운 상태이니 정리하고 그만 들어가 쉬라는 말로 수고했다는 말을 대신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존은 어둑한 골목길을 걸어 불이 꺼진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고, 모니터만 깜빡인 채 비워진 핀치의 자리에 시선을 주고 핀치가 일하는 곳과 정반대에 위치한 비문학 코너의 뒷면의 책장 뒤에 숨겨놓은 비밀 문을 열어두고 그 안에서 한참 무기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핀치는 총기류에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고, 어쩌다 최루탄이 도서관 바닥을 구르는 날에는 세찬 해롤드의 시선을 한참이나 받아내야 했기 때문에 존은 무기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물론 해롤드의 뒷 편에 있는 서랍장에 K2소총을 숨겨놓기는 했지만 워낙 꼼꼼하게 숨겨놓았으니 핀치가 모르거나 알게 되더라도, 고용주를 걱정하는 직원의 애사심이라고 생각해 너그럽게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파산한 은행의 소유주로 되어있는 도서관은 현재 맨하튼 내에서 가장 뛰어난 화력을 자랑하고 있는 곳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시간에 도서관의 모든 불이 꺼졌을 때 존은 당황했다. 해롤드의 컴퓨터와 시스템이 24시간 돌아가는 내내 도서관의 전력이 끊어진다는 사실은 존의 상상외의 범위였기 때문이었다. 존은 손에 쥐고 있던 총을 고쳐쥐고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고 비문학 코너를 빠져나와 핀치의 사무실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저 정전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존은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핀치?”

혹시나 해롤드가 돌아왔을까 싶어 해롤드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묵묵했다. 핀치는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비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귀가를 했다면 어떤 식으로 귀가의 사실을 존에게 알렸을 것이었고, 핀치의 연락이 없다는 것은 핀치가 일을 마친 후,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였다. 존은 긴장으로 목이 칼칼해 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여전히 발소리를 죽이고 핀치의 자리로 가까이 다가섰다. 어둠에 잠긴 공간속에서도 핀치의 컴퓨터는 형형한 빛을 빛내며 제 할 일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도서관의 전력이 끊겼다고 하더라도 핀치가 설치해 둔 비상전력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핀치는 늘 제 2의 3의 플랜을 만들어 두는 사람이었다. 그 치열함에 기가 질리기도 했다가 감탄하기도 했다가 때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단순한 정전인가. 

쥐가 전선을 파먹어서 생기는 정전이라면 뉴요커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존에게도 낯선 일은 아니었다. 그저 위기감에 절여진 행동패턴이 작동했을 뿐이었다. 도서관의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아무런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존은 총을 든 손을 내리고 얕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보니 번호가 나오지 않았다. 모든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전력을 끊을 만큼 계획된 위협이 있었다면 번호로 미리 경고 될 일이었다. 기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새 기계의 전조를 의지하게 된 자신을 인식한 순간, 어쩔 수 없이 허탈해져 버려서 등을 돌려 다시 비문학 구역으로 돌아가 전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키스했다. 

얇은 입술이었고, 뜨거운 체온이었다. 그리고 차가운 바람 냄새가 났다. 순식간에 눈 앞이 가려져서 자신도 모르게 총을 쥔 손에 힘을 준 순간, 입술이 닿았다. 키스는 꽤 길고 농밀하게 이어져서 자신도 모르게 잔뜩 취해버린 후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핀치의 외로운 시스템만이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

“마무리는 미스터 리스가 맡기로 했으니 쇼양은 먼저 들어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지금 퇴근하라는 의미로 말한 건가요, 핀치?'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맞춰봐요. 내가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 죽였을 때가 아니면 일에서 떨어지라고 스스로 말해본 적 없는 핀치가 나에게 집에 들어가라, 고 했으니 나는 당연히 당신에게 무슨 문제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죠?'

“오, 아닙니다. 순수한 의미로 휴식을 권유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일은 모두 힘들었으니까. 미스터 리스에게도 마무리가 끝나면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고 오라고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조심해요, 핀치. 그 덩치는 나 같지 않아서 순순히 속아줄 지 모르겠으니까. 그것만 말해줘요. 번호가 나왔나요?'

해롤드 핀치는 사민과 끊어지지 않은 통화를 이어가면서도 눈으로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늘 낯선 이들의 행적을 알려주던 기계의 계산은 오늘도 틀리지 않아 내일의 위기에 처한 사람의 신상을 모니터에 꺼내두고 해롤드에게 그 상황을 외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숨이 막힐 때가 있는 것은 모니터에 뜬 인적사항보다 더 익숙한 얼굴이 뜬다는 사실이었다. 해롤드는 두 눈을 깜빡이며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마우스를 움직여 모니터를 꽉 채우고 있는 남자의 사진을 작게 내렸다. 운전면허증 증명사진은 곧 프린트되어 나올 것이었다. 그리고 해롤드는 마저 대답했다. 

“아닙니다. 적어도 오늘 밤은 좀 잘 수 있겠네요.”

해롤드의 말에 쇼는 적당히 맞춰주며 그러나 의심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국제 킬러에게 뻔한 속내를 들켰으면서도 모른 척 해주기를 당부하는 일은 왠만한 친분과 신뢰가 아니고서야 안 되는 일이었다. 전화를 끊고 해롤드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프린트된 사진을 가져와 판넬에 붙여 두었다. 모니터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번호에 대한 정보와 인적사항이 발견될 때마다 뜨고 있었지만 사실 해롤드 핀치는 인터넷이나 기계가 찾을 수 없는 이번 번호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학 때 어떤 과목을 좋아했고, 기숙사에서 어떤 스타일로 방을 꾸몄다든가, 아서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든가, 해롤드와 단 둘이 있을 때 귓볼을 자주 붉혔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기계와 인터넷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그의 추억의 영역에 대한 이야기였다.

“놀슨 타일러 Nolson Tylor.”

잊지 못할 첫사랑이라든가, 어떤 말로 고백을 했더라. 그리고 내가 무슨 대답을 했지? 해롤드는 눈을 감았다. 기계가 절대 닿을 수 없는 기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의 기억이었다.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감정의 흔적이 켜켜이 쌓은 곳에서 모든 기억들은 가치를 달리해서 사라지거나 그 곳에 남겨지거나 또는 미화되었다. 가치가 매겨진 기억들은 기계가 제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모두에게 그런 기억들이 있었다. 정말인지 모두에게. 

 

**

 

놀슨 타일러의 이름을 완전히 외우게 된 것은 놀슨이 자신의 강의실 앞에 나타난 지 세번째가 되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목적은 단순했지만 점심을 먹자고 권유하는 주제에 꽃이라도 든 소년마냥 얼굴을 붉히는 꼴이 못 마땅해서 두 번 정도 거절했지만 사람을 세 번이나 거절해 민망하게 만드는 일은 자신도 하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세 번째는 못 이기는 척 승낙했다. 사실 한번이라도 제대로 앉아 식사를 해주지 않으면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네 엑스러버가 왔다는 짖궂은 아서와 네이슨의 장난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더 좋은 곳에 가도 됐는데.”

“여기 좋잖아. 미국에서 제일 맛있는 감자튀김을 팔고 있고.”

해롤드의 대답에 놀슨은 수줍게 웃었다. 이름은 기억 못해도 사람의 접근자체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해롤드는 얼마 안 되는 인맥을 통해서 놀슨 타일러의 평판에 대해 들었다. 놀슨 타일러. 아버지는 전기 관련 회사 엔지니어로 입사했다가 임원으로 차근히 승진하신 케이스. 어머니는 유치원의 보육교사였다가 몸이 좋지 않아 현재는 일을 그만두고 병원과 요양을 병행하면서 집안일을 하시는 모양이었지만 워낙 활달하셔서 지역활동에 열심이라고 들었다. 그런 가정의 두 형제 중 막내 아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예상되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밝고 티없는 성격, 해맑은 사고방식, 솔직한 화법, 속내를 숨길 줄 모르는 매력적인 성격으로 대표되는 것들. 불행히도 그 어느 것도 해롤드가 좋아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놀슨 타일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적당히 그런 티도 냈다고 생각했지만 당사자에게 전혀 와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해롤드는 어쩌다 얼굴만 겨우 알게 된 매력적인 청년의 마음에 들었을 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마음에 보답할 수 없음을 정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는 그랬다. 보답 받을 수 없는 마음은 금방 잘라내야 한다고. 마음이 더 커지고 깊어지기 전에 잘라내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그 마음을 품은 사람을 위해서도 합리적인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재미없는 식당에서 맛이 없이 눅눅해빠진 감자튀김 옆에 케첩을 쭉 짜내며 해롤드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놀슨의 붉어진 얼굴이 더욱 더 붉게 물들었던 것 같다. 붉게 물든 것은 양 뺨만은 아니었다. 꺼내 보지도 못했던 마음이 여기저기 얼룩덜룩 붙어서 놀슨의 눈가마저 붉게 물들였다. 나중에서야, 적어도 십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것 까지는 없었다고 해롤드는 옅게 후회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할 시기에 이르렀다. 

브루클린의 외곽에 있는 작은 동네의 낡은 집의 문을 두드리며 해롤드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없었다고. 그러나 그 때는 우리 모두 어렸었고, 나는 좀 어딘가 비틀어져 있었고 너는 지나치게 해맑았으니 우리 서로 비긴 것 아니냐고, 나름 그럴듯한 변명도 가슴에 품고 초인종을 눌렀지만 문을 열고 나온 놀슨을 보자마자 마법처럼 입이 다물어졌다. 

“해롤드?”

“놀슨 타일러. 날 기억하겠나?”

문을 반쯤 열고 서서 놀슨은 해롤드를 아래 위로 가만히 훑어 보았다. 경계심에 가득 찬 사람은 해롤드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지만, 옛 지인의 망가진 모습을 보는 일은 어떤 방식이든 유쾌하지 않다. 유능하고 연봉이 높은 아들이 둘이나 있음에도 놀슨 타일러는 연금으로만 생활했고 통장잔고도 넉넉하지 않았다. 듣기로는 MIT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임원으로 계신 회사로 곧바로 오퍼를 받아 인턴으로 들어갔다고 했는데, 잘 나가는 회사의 엔지니어 생활을 하며 근 30년에 가까운 경력을 쌓은 사람의 말로 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해롤드는 마른 입술을 다시며 다시 물었다. 

“해롤드 핀치일세. MIT에서 같은 기숙사를 사용했는데,”

“미안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소만.”

“… 놀슨?”

“MIT를 졸업한 것은 맞지만 해롤드 핀치라는 사람은 모릅니다. 누굴 찾아오셨다고 하셨죠?”

그러니까 자신이 너무 냉정했다. 그렇게 거절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오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던 해롤드는 놀슨이 문을 닫기가 무섭게 3중의 잠금 장치가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이제는 머리를 박고 후회하고 있었다. 

 

**

 

존 리스는 심각한 얼굴로 핀치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 잘생긴 하관에 두 손을 괴고 앉아있었는데 환갑을 바라보는 해롤드가 턱을 괴고 앉아있을 때에는 그럴 수 있지 넘어갈 수 있었던 자세를 존 리스가 똑같이 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자신을 감내할 수 없었던 쇼가 참지 못하고 존을 지적했다. 

“그 자리에서 나오든가, 지금 하고 있는 자세를 때려치우던가 한 가지만 해줄래요?”

“기계가 내 말에 대답을 안 해서요. 내가 지금 당신을 불쾌하게 했나요?”

“의도였든 아니든 그렇네요. 일단 그 자리에서 좀 나오겠어요? 핀치가 나는 컴퓨터 근처에도 못 가게 하던데 왜 당신은 앉아있죠?”

“쇼. 당신이 프링글스를 통째로 들고 와서 이 앞에서 먹고있지만 앉았더라도 해롤드가 그렇게 냉정한 부탁을 하지는 않았을 거에요.”

“단 한 톨도 흘리지 않았어요. 그 이상한 자세 좀 안 할 수 없어요?”

“기계가 질문에 대답을 안 할 수도 있나요, 핀치의 기계가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요.”

“루트의 말에 의하면 기계가 대답을 안 하는 경우는 두 가지래요, 존. 엄청 기분 나쁘거나, 엄청 멍청하거나.”

“… …”

“둘 다인가 보네요.”

쇼가 기분 좋게 웃어 보이고 나서야 존은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그만두었지만 핀치의 컴퓨터 앞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야구공을 던지며 베어의 놀이상대가 되어주었던 쇼는 베어보다 빨리 야구공에 질려 도서관의 바닥에 주저 앉았고 존은 그런 쇼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다. 존 답지 않은 일이었다. 쇼가 말했다. 

“좋아요, 물어봐 줄게요. 기계에게 뭘 물어보고 싶은거죠?”

“사생활이에요.”

“그럼 루트에게 물어볼게요. 루트가 물어보면 기계는 다 대답해주니까.”

“누가 나한테 키스했어요.”

“… …”

“3일 전, 이 도서관에서.”

“베어, 아무한테나 입술 내주지 말랬잖아.” 

“미안하지만 이족보행을 했으니 베어는 아닐 것 같네요.”

“오, 그럼 혹시 잠들어 있었나요? 잠자는 숲 속의 수트입은 아저씨?”

심각하지 않은 쇼의 빈정거림에 존은 곱지 않은 시선을 쇼에게 던졌지만 존 리스의 키스사건은 쇼의 흥미를 끌 만한 주제는 아니었는지 쇼는 다시 베어에게 야구공을 던져주며 아까 못했던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기계는 몇 번이나 계속되는 존의 질문에 연이어 묵묵부답이었다. 도서관 내부에는 CCTV가 없는 대신 핀치가 만일을 위해 긴밀하게 연결시킨 도청장치가 있으므로 그것 만이라도 보여 달라고 해도 기계는 대답대신 <접근권한이 없습니다.>하는 대답을 반복했다. 이럴 때마다 존은 기계를 구성하고 있는 볼트와 너트와 흔한 납땜에게 마저 살의를 느꼈다. 그러나 기게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 날밤의 일을 너에게 알려주지 않겠다. 그러니 그 날밤의 일이 분명히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설상가상 그 이후로 해롤드와 전혀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자리 주인은, 퇴근했나요?”

“핀치는 요즘 바빠요. 뭔가 개인적인 일이라고 그랬어요.”

“굉장히 참견해달라는 말로 들리네요. 알아볼까요?”

“좋아하지 않을거에요.”

“나쁜 의도는 없어요. 취미같은 거죠. 그래서 할 거에요, 안 할거에요?”

품에 안겨 든 베어를 능숙하게 안고 베어의 뺨을 쓰다듬어주며 쇼가 쾌활하게 말했다. 일이 없는 3일, 쇼의 인내심에도 점점 한계가 오고 있었다. 

 

**

 

“있잖아요, 핀치. 사실 나는 이런 시간이 가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인기척을 내도 됐을 텐데요, 그로브스 양.”

루트는 별로 놀라지 않은 기색으로 대답하는 해롤드를 향해 의례적인 미소로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했다. 벤치에 기대앉은 핀치의 옆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 한 후 루트는 가지고 온 샌드위치의 포장을 뜯었다.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 옆자리를 차지한 일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해롤드가 그제야 루트에게 눈길을 주었다. 해롤드가 물었다. 

“식사를 걸렀나요?”

“그녀가 빨리 가보라고 그래서 빨리 왔죠. 사실은 식사정도는 하고 왔어도 됐을텐데 내가 궁금해서 빨리 왔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많거든요 해롤드.”

“굉장히 신나보이네요.”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당신이 들었어야 해요, 해롤드. 처음에 <관리자의 치정>이라는 메세지를 받자마자 당장 눈 앞의 에이전트를 쏴 죽이고 뉴욕으로 달려오고 싶었다니까요.”

“… …”

“물론 수사기관에 인계하고 왔어요. 이번 달 라이오넬의 실적이 기대되네요.”

루트는 말을 마치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말없이 해롤드가 주시하고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을 끊임없이 따라가며 물었다. 

“저 사람인가요? 아담 타일러?”

“맞아요. 같이 있는 건 아담 타일러의 아들입니다. 이제 여섯 살이라고 하더군요.”

“아버지를 많이 닮았네요. 물론 아담 타일러 말이에요.”

“그런가요.”

“놀슨 타일러의 졸업사진을 봤거든요. 꽤 미남이더군요. 물론 당신도요 해롤드.”

“… …”

“여기서부터는 그녀가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녀가 알 수가 없는 영역이었겠죠. 그래서 치정이라는 말로 구분될 수 있는 몇가지 상황을 생각해봤어요. 치정이라고 하는 건 일반적으로 일대일의 만남에서 성립되지 않은 말이니까, 놀슨 타일러와 당신. 그리고 누군가 또 하나가 있다는 말이겠죠. 내 말이 맞나요?”

“설명할 거 없어요, 그로브스 양.”

“해롤드. 내가 이런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한 건 진심이었어요. 우린 모두 누군가를 잃기만 했잖아요.”

“… …”

“누군가를 얻기 위한 노력도 필요해요. 해롤드.”

그러나 루트의 말은 끝을 맺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공원이 시끄러워지고 FBI가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흩어지기 또는 뭉쳐져 저들끼리 긴장하여 자리를 움직이는 동안, 아들을 챙기기 위해 달려가던 아담 타일러가 제압되었고 그의 여섯 살 된 아들이 아버지가 제압당하는 모습에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얼굴로 해롤드가 몸을 일으켰지만 곧 루트에 의해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해롤드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며 루트는 또 한 사람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얕은 만큼 냉정하게 잘라냈으니 다시는 그 뿌리가 올라오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그렇게 설명한들 설득력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해롤드 핀치는 모든 것에 다 알아도 사랑을 몰랐다. 그보다 좀 더 점도있고 끈적한 감정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것은 경험으로 겪어낸 후 에야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고 대개 해롤드는 그런 경험에 약했다.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익명의 삶이 해롤드를 그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깊이 있는 감정들과 기억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해롤드는 놀슨이 다시 제 강의실 앞에 나타났을 때 사실 답을 잃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계산 외 변수는 인간에게만 적용되어서 해롤드는 인간을 계산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잔뜩 당황한 얼굴로 놀슨에게 다가오던 해롤드를 말 그대로 울먹이며 바라보던 놀슨에게서 해롤드는 제가 준 상처를 고스란히 들여다봤다. 그래서 싫었다. 티 없는 연못에 제가 던진 돌이 박혀서 여전히 물결친다. 차라리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서 자신을 실컷 원망하고 사라져주는 게 어쩌면 나은 일일지도 몰라서, 욕이라도 하면 듣고 있자, 원망이라도 하면 껴안고 가자 생각하고 서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던 조금 원망스러운 빛을 띄고 바라보던 놀슨이 말했다.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잖아. 해리.”

“놀슨?”

“좋아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잖아. 그렇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놀슨. 내 이야기 못 들었어?”

“들었어. 네가 하는 말 다 알아들었지만, 그래도 좋아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았어. 그렇지 해리?”

“… 놀슨.”

MIT에는 생각보다 멍청이들이 많아서, 자신이 절대적으로 뛰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멍청이들이 많아서 해롤드는 잠깐 놀슨 타일러도 그 멍청이들 사이에 끼워줘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해롤드의 생각의 도피를 단숨에 멱살 잡아 끌고 오듯 놀슨이 손에 쥐고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해롤드는 두 눈을 깜빡이다 그 봉투를 건네 받았다. 봉투 안에서는 맛있는 기름냄새가 났다. 놀슨은 눈가가 붉었다. 꼭 그 날처럼. 놀슨은 입술을 달싹이며 무엇인가 더 말을 하려다 등을 돌려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고무로 된 탄성 좋은 바닥이 신발소리를 삼켰지만, 두고 간 마음을 삼키지는 못해서 해롤드는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놀슨이 쏟아 놓고 간 진심을 마주해야 했다. 

놀슨이 주고 간 것은 미국에서 가장 재미없는 식당의 감자튀김과 햄버거 포장이었다. 멋 없는 공대생의 멋 없는 배려라는 건 그런 것이어서 고작해야 해롤드가 지나간 말로 대답하던 '미국에서 가장 맛있는 감자튀김'을 사다주는 것 뿐이었다. 포장안에는 포장된 케첩이 다섯개나 굴러다녔다. 웃을 수 밖에 없었다. 

**

“아담 타일러 Adam Tylor. 기업 기밀을 팔아 넘긴 죄로 잡혔어요. 현재 본인은 결백을 주장하고 있지만 증거가 워낙 확실한데다 팔아 넘긴 곳이 기업이 아니라 국가에요.” 

“국가 안보에 관련된 일인가요? 그런데 왜 우리한테 왔죠?”

“FBI가 출동했으니 정확히는 우리한테 온 번호가 아니죠, 핀치. 그렇죠?”

존이 말하자 아담의 사진을 걸어 놓고 한참이나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해롤드가 걸음을 움직여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다른 사진 한 장을 더 들고 가 판넬에 붙여 두었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놀슨 타일러. 아담 타일러의 아버지이자 아담 타일러가 기밀을 빼낸 기업의 간부이죠. 현재는 퇴직해서 부르클린 외곽의 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아들들과는 연락을 거의 안 하는 모양이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조사가 필요해요.”

“아들과 관련해서 아버지까지 위협을 받고 있는 건가요? 그래도 왜 이 문제가 통째로 FBI로 넘겨지지 않았죠?”

“그걸 이제부터 알아내야 해요. 놀슨은 MIT를 졸업하고 바로 엔지니어로 입사해 한 회사에서 30년간 근무했습니다. 그가 일하던 회사는 JK Holdings, 정부의 하청으로 몇 가지 사업을 진행한 걸로 알고 있어요. 정보가 샜다면 아마 그 과정이겠죠.”

“이해가 안되네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놀슨은 FBI로 넘겨져야 해요. 보호를 받아도 우리 관할이 아니라고요.”

“기계가 이유없이 우리에게 번호를 넘겨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일단 우리에게 내려 온 번호니까 우리가 맡아서 처리하죠.”

납득이 되지 않는 사건의 배당은 쇼를 불쾌하게 했지만 루트만이 곧 사근사근한 말투도 그녀를 달랬다. 존은 아까부터 묵묵부답으로 해롤드의 설명을 들을 뿐이었지만,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존은 해롤드를 곤란하게 할 만한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해롤드가 굳은 다리를 절뚝이며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마우스를 움직여 몇 번 클릭을 하더니 이내 쇼를 달래고 있는 루트를 향해 물었다. 

“그로브스 양. 내 컴퓨터에 접근했나요?”

“미안하지만 당신 컴퓨터에 접근하려면 해킹보다 허락을 맡았겠죠. 우리 이제 그런 사이 아닌가요, 해롤드?”

“그럼 누가,”

“내가 썼어요. 해롤드.” 

내내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생각을 곱씹고 서 있던 존이 생각을 마쳤는지 굳어 있는 표정을 풀고 해롤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컴퓨터를 손대지 않는 존을 알고 있었던 터라, 해롤드의 얼굴이 답지 않은 놀라움으로 물들어갔다. 존이 덧붙였다. 

“기계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요.”

“기계가 대답해주던가요?”

“아니요, 그래서 사람에게 물어보려고요.”

“잘 되길 빕니다.”

해롤드는 언제나처럼 모니터에 집중하고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르지 않은 해롤드의 모습에 쇼를 데리고 나선 루트가 사라지는 뒤를 따라 나서던 존이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걸음을 멈추고 해롤드를 다시 돌아보았다. 

“거기에 앉아있는 게 훨씬 낫네요, 핀치.”

“… …”

“오래 자리를 비우니까 이상했거든요.”

해롤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존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존의 걸음소리는 조금 더 가벼워졌고, 해롤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갔을 뿐이었다. 

**

놀슨은 그 뒤로 해롤드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눈에 띄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애매하게 벌어진 거리만큼 해롤드를 애틋하게 바라보다 사라지는 일이 종종 생겼다. 메사추세츠의 봄은 완연했고, 십대 내내 럭비공과 뒹굴고 책만 파다가 입학한 멍청이들만 모였어도 학교에는 응당 불어야 할 봄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해롤드를 향한 놀슨 타일러의 지고 지순한 모습이 아이들의 입에 금방 오르내렸다. 원치 않는 주목을 받는다는 사실은 해롤드를 힘들게 했으므로, 해롤드는 놀슨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았지만 MIT를 합격한 공부머리만큼 성실한 놀슨은 계속해서 해롤드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 …”

오전 수업을 가기 위해 기숙사의 문을 열었다가 발 밑으로 무엇인가 툭 떨어졌다. 문고리에 걸려 있었던 작은 종이봉투가 채 다물지 못한 입을 벌리고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냈다. 작은 종이봉투에 곱게 접어 포장된 꽃씨들이 해롤드의 발 밑을 굴렀다. 해롤드가 자라던 곳은 봄이 되면 거리마다 제비꽃이 피어났다. 제각각 피어난 모양의 제비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 단조로움이 지겨우면서도 집에 왔다는 안심을 주었다는 사실을 내가 놀슨 앞에서 했었나, 안 했었나. 해롤드는 무릎을 굽혀 앉아 흩어진 제비꽃 씨앗을 주워 종이봉투에 담고 기척이 드문 복도를 훑어 보았다. 아무도 없었지만, 심지어 작은 카드도 쓰여 있지 않았지만 누가 했는지 모를 만큼 자신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냉정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잠시 고민하다 기숙사 방문을 조금 열고 그 안으로 던지듯 씨앗봉투를 던져 넣었다. 꽃씨는 버릴 수 있었지만 모처럼 찾아온 봄은 버릴 수 없었다. 그 이유 하나뿐이었다. 


결국 그 중에 단 한송이도 제대로 살릴 수 없었다. 그때는 꽃보다 중요한 게 많았으니까.

 

놀슨 타일러는 오늘도 찾아 온 해롤드를 보고 놀란 기색을 지어 보이기는 했지만 저번처럼 매정하게 모른 체하거나 쫓아내지는 않았다. 다만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들어오는 해롤드를 말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만 그는 현관을 지나 집에 따라 들어오며 들리는 핀치의 엇나간 발소리에 고개를 돌려 핀치를 확인하고 확실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핀치는 익숙한 것인 듯 놀슨을 향해 웃어 보였다. 

“오만하게 산 벌이죠.”

놀슨은 차를 내왔다. 초췌한 모습으로 핀치와 작은 쟁반위에 올려 온 찻잔을 잠시 번갈아 바라보던 놀슨이 어색하게 찻잔을 핀치 앞에 내려놓았다. 찻잔에는 홍차가 담겨있었다. 센차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아마 해롤드가 다시 찾아올 지 예상하지 못 했으리라. 해롤드는 웃으며 기꺼이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댔다. 놀슨은 그런 핀치를 가만 바라보고 있다 무뚝뚝한 목소리를 긁어냈다. 

“해롤드,라고 했소?”

“맞습니다. 며칠 전 말씀 드렸다시피 복지국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일찌감치 회사를 은퇴하고 연금으로만 먹고사는 사람이요, 숨겨놓은 재산같은 것도 없고 연체된 세금이라봤자 몇 푼이나 될 지 모르겠으니 조사할 재산이 있으면 조사하고 가져갈 게 있으면 어디 한번 가져가보시오.”

쌀쌀맞은 놀슨의 대꾸에 핀치는 부드럽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핀치의 예상대로 놀슨은 냉랭하게 대답하는 내내 자꾸만 자신의 새끼 손가락으로 소파 옆의 콘솔 위에 올려 둔 작은 전자시계의 끝을 손 끝으로 밀었다.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은 비단 전자시계만은 아니리라. 해롤드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갈 게 없으면 그만 썩 돌아가시오!>

<미스터 타일러, 저에게 숨기는 일이 없어야 제가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핀치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촬영용 카메라를 이런 일반 주택에 잠입하면서 쓰기에는 어떤 변명과 설정을 갖다 붙여도 말이 되지 않아 핸드폰 카메라로 부지런히 촬영을 하고 있는 동안, 쇼가 물었다. 존은 해롤드의 핸드폰에 설치된 녹음장치로 대화 내용을 녹음하는 중이었고, 와이파이의 주파수를 연결하고 광역대를 조사해 현재 도청장치가 연결된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내려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동시에 진행되는 두 가지 일로 정신이 사나운 와중에 사민 쇼의 질문은 왠만큼 생소한 것이라 존은 귀를 덮고 있던 헤드폰을 빼고 쇼를 향해 다시 물었다. 

“뭐라고요?”

“핀치가 좀 이상하다고요.” 

“핀치가 안 이상할 때가 있었나요?”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요. 자꾸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게 유도하고 있잖아요.” 

“신뢰를 얻어내는 건 번호를 보호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규칙이에요. 쇼.”

“고마워요, 선생님. 더 가르칠 말이 남아있나요?”

“없는 거 같네요.”

“핀치는 지금 상황에 필요한 정보를 모르지 않아요, 그런데 핀치는 대부분의 정보를 그냥 넘기고 있어요. 이건 꼭 마치,” 

“… …”

“동창회를 엿듣는 기분이라고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동창회라면 우리 둘이 일가견이 있잖아요.”

“당신은 뺨을 두 대나 맞았고요. 존.”

쇼가 이겼다. 존은 쇼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쇼를 흘겨보곤 다시 헤드폰을 끼고 대화에 집중했다. 쇼의 말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쇼의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해롤드는 대화의 대부분을 아들인 아담 타일러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대신, 놀슨 타일러의 지난 생애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듣고 있었다.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한 대화는 핀치의 전문분야가 아니었으며, 사회 생활을 시작한 직후의 상황에 대해서만 이야기의 시점이 맞춰진다는 것도 석연치 않은 점이었다. 이것은 마치, 핀치가 일부분 번호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아는 사람인 듯 했다. 가끔 이런 일이 있었다. 말하자면 비 관련의 관련자로써 팀 멤버들의 지인이 선정될 경우가 대게 이러했다. 핀치의 지인이라는 말인가. 나이대로 보자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냥 말해줘도 됐을텐데. 존이 생각에 빠졌을 무렵, 다시 한번 쇼의 목소리가 존의 빠져나간 정신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현실로 끌고 왔다. 존이 퍼뜩 헤드폰을 벗어내리며 쇼를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다음부터는 귀를 한 다섯 개 달아 놓는 게 어때요? 적어도 그 중에 두 개는 내 말을 듣겠지.”

“다른 생각 하느라 그랬어요. 뭐라고 그랬죠?”

“그래서 그 키스 도둑 찾았냐고요.”

“아.”

존이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기계가 대답을 안 하네요.”

“그 때가 언제라고 그랬죠?”

“일주일 정도 되었으니까, 지난 주 수요일이에요.” 

“지난 주 수요일이면 데킬라 마셨을 때인가요?”

“술김은 아니에요. 그 정도로 취하지도 않았고요.”

“어련하겠어요.”

대충 말을 끊은 쇼가 놀슨의 집 앞을 촬영하던 핸드폰을 내리고 씨익 웃었다. 

“그 때 나와 핀치는 일찍 들어갔으니까 일단 우리 둘은 제껴두고 생각해요. 일단 우리 물에 젖은 보스부터 구해주자구요.”

놀슨의 현관에서 문을 닫고 나온 핀치는 머리부터 흠뻑 젖은 꼴이었다. 존의 입이 벌어지기도 전에 쇼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웃었다. 마지막에 무슨 대화를 했지, 뭐라고 했더라. 쇼와 대화하느라 놓친 그 대화를 다시 되돌리기도 전에 존은 헤드폰을 내려놓고 차의 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커피에 얻어맞은 핀치는 존을 보고 큰 눈을 굴려 눈치를 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존의 부축을 거절하고 차로 왔지만 핀치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민망하게 붉어진 뒷목이 너무나도 잘 보여서 존은 핀치를 도와주겠다고 더 말할 수도 없었다. 

 

루트의 기분은 기본적으로 늘 멤버들에 비해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요즘은 특히 더 그런 것 같아서 존은 귀가 찢어질 듯 웃는 루트의 웃음소리를 견뎌내느라 애를 써야했다. 쇼의 사정도 다르지 않은지, 쇼는 루트의 품에 거의 반쯤 안겨서 몹시 불쾌하다는 얼굴로 앉아 있었지만 루트는 이 농도 깊은 스킨십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다 웃었어?”

“내가 웃었다는 건 해롤드에게 비밀로 해줘. 존, 그래서 마지막 대화를 전혀 못 들었어요?”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무슨 대학에 관련된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그래요? 해롤드가 뭐라고 하던가요?”

“꽃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해롤드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와,”

“다 웃었으면 그만 나오시겠습니까? 그로브스 양?”

커피에 흠뻑 젖은 탓에 샤워를 하고 나온 해롤드는 편한 옷에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을 유지했지만 베어까지 합세해 해롤드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여덟 개의 눈을 차마 외면하지는 못하겠는지 가만 앉아 한참이나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결심했다는 듯 시선만 돌려선 외치듯이 말했다. 

“궁금한 게 있어도 참으세요!”

“정보가 없으면 일을 못 해요. 해롤드. 우리를 알잖아요.”

“일이 진행 될 만큼의 정보는 충분히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쇼양.”

“해리, 그러 지말고 대학동기 였다는 것 까지만 말해주는 건 어때요? 이미 내가 얘기했나요? 그렇대, 쇼.”

“… 그로브스양.”

“와우, 대학 동기? 놀슨 타일러와? 그때 해롤드 핀치이기는 했어요? 스위프트? 휘슬러? 마틴?”

“이름때문에 숨겼던 건 아니었을 거에요. 그렇죠 핀치?”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쇼를 막아서고 나선 것이 하필이면 존이라 도움이 안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해롤드는 눈동자를 올려 존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모니터에 집중하며 말했다. 

“모종의 사건이 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커피까지 맞은 걸 보면 모종의 사건이 핀치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었던 모양인데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원인은 저한테 있다고 말씀 드려야겠군요.”

“… …”

“과거의 앙금을 풀어야 신뢰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대학 때 일을 무슨 사과까지 해요, 해롤드. 그때 뭘 했든 시간이 용서했을 텐데. 따먹고 버리기라도 했어요?”

쇼의 저속한 말에 해롤드는 짐짓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그것을 정정하지 않았다. 쇼의 얼굴로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퍼져 나가려고 할 때 눈치 빠른 루트만이 해롤드의 임계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쇼의 팔짱을 끼고 애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햄버거 먹으러 나가자, 자기야.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다녔더니 배가 고프네. 그게 편하죠, 해리?”

“핀치. 내가 지금 핀치에 대한 호감도가 얼마나 올라갔는지 핀치는 모를거에요.”

“쇼, 나가자. 오는 길에 센차 사 올게요.”

“나는 커피 부탁해요.”

“싫어요.”

루트와 쇼가 사라졌다. 그러므로 존 리스와 해롤드만 남게 되었다. 어색한 침묵과 폭탄같이 떨어진 해롤드 핀치의 과거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던 자신만이 다 타버리고 남은 폭탄재처럼 자작이고 있었다. 존 리스는 이럴 때 만큼은 정말 자신의 다분하지 못한 임기응변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해롤드의 과거에 대해서 접근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록의 접근이었지, 사생활에 대한 접근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제일 똑똑하고 이해 못할 사람을 모아 놓은 곳에서의 해롤드 핀치를 이제서야 떠올리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으므로 상상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핀치,”

“말해두지만, 먼저 접근한 쪽은 그 쪽이었습니다. 제가 아니었어요, 결코 동의없이 저지른 부적절한 행동이 아니었고, 서로 합의하에..,”

“핀치, 핀치. 그 설명을 바랬던 게 아니었어요. 쇼는 나갔어요.”

“… 미스터 리스라도 알아줬으면 했어요.”

“누구나 다 가지는 그런 경험 아닌가요. 물론 그 도덕적인 범위를 넘어가자는 말은 결코 아니었어요. 제 말은.”

대화는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대화의 진창을 막아 줄 핀치가 어쩐지 입을 꾹 다물고 존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선고를 기다리는 간절한 모습으로 자신을 올려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 커피를 얻어맞고 나온 해롤드와 젊은 해롤드의 모습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낯선 남자를 울리고 그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길래 사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죄에 대한 댓가로 커피를 푹 뒤집어 쓴 청승맞은 꼴이 되어야 했을까. 존의 식견으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인과였다. 그렇지만 해롤드에게 티 내지 않기 위해 존은 꽤 말을 고르는 수고를 해야 했다. 

“나도 따먹고 버린 적 있어요, 핀치.”

“… …”

핀치가 오만상을 구겨서 정성스럽게 존을 욕했다. 단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니 해롤드, 내 말은. 내 말 끝까지 들어봐요. 존이 말을 더하자 해롤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총총대는 걸음으로 사라졌다. 단지 해롤드에게 공감했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쌍욕을 얻어들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린 존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핀치의 뒤를 따라다니며 자신의 결백을 설명해야 했는데, 나중에 이 모습은 고스란히 기계에 찍혀 루트의 귀에 전달되었고 루트의 존 리스를 향한 경멸은 한층 더 심해졌다. 

**

과학과 설계를 신봉하며 살아온 해롤드도 시간의 힘 앞에서는 퇴화되는 인간적인 요소들을 익히 보아왔기 때문에 애초에 인간에 대한 기대감이 적었던 게 사실이었다. 놀슨 타일러가 어제 핀 꽃처럼 반짝이는 얼굴로 사랑을 고백해와도 무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어제 피어났든, 오늘 피어났든, 내일 피어날 예정이든 꽃은 꽃이며 그것은 곧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래의 생기를 감추고 형태를 달리해 무너질 것이었다. 그러니 그것에 마음주지 말자고, 기대하지 말자고 수 없이 마음먹고 자신을 감춰 왔어도 정은 정이라서, 그것이 따스해서, 기댈 수 밖에 없는 것 들이라서, 그리고 너무 당연하게도 자신도 무력한 인간중의 하나여서 기댈 수 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며칠째 텅 비어 있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기숙사 방문을 바라본다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없는 사람처럼 제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놀슨의 빈자리를 실감해야 한다는 사실이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해롤드는 원래도 주위에 사람을 별로 두지 않았다. 그래서 몇 안되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의 공간이 컸다. 한 사람이 빠져나갈 때마다 큰 구멍이 생겼다. 메우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람이 사라지고, 또 메우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람이 떠나갔다. 자신으로 살 수 없다는 인생을 가늠했을 때가 되서야 사람이 중요하지 않았지만, 점점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놀슨이 더 이상 자신을 향해 피어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해롤드는 모두 다 죽어버리고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제비꽃 씨앗을 손바닥에 위에 올려 두곤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모두 쓸어 쓰레기 통에 버렸다. 저 꽃을 피우게 할 자신이 없었다. 일년이 넘도록 자신을 바라보았던 놀슨의 마음도 아마 이런 것이었나 보다. 그래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나 보다. 이해할 수 있었지만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

“미스터 놀슨, 저희와 얘기를 하셔야 아드님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다음 날 핀치는 방수 성능이 있는 재킷을 입었고, 다시 놀슨의 집을 찾아갔다. 쇼는 루트와 함께 다른 미션으로 나가버린 후였고, 핀치와 함께 움직일 사람은 존 밖에 없었다. 핀치가 놀슨의 집 문을 두드리며 놀슨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로 좋은 징조였던 적이 없었다. 존은 장전된 총을 들고 핀치의 옆에 가까이 붙었고, 핀치는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문을 두드려 놀슨의 이름을 불렀다. 역시나 대답이 없자 존이 핀치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핀치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존이 몸을 부딪쳐 문을 부쉈다. 낡은 주택의 나무 판을 덧대어 겨우 바람만 막았던 문이 형편없이 소리 내어 부숴졌다. 그리고 존이 그 안으로 들어갔고, 핀치가 뒤 따라 들어갔다. 집안의 모습은 어제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저에게 화를 내며 커피를 퍼붓던 놀슨이 제가 앉아있던 소파의 자리에 쓰러져 있다는 것은 달랐다. 핀치는 소스라치게 놀라 무릎을 굽혀 앉아 놀슨의 어깨를 붙잡았다.

“놀슨! 타일러! 정신 차려보게! 놀슨!”

“911에 전화할게요. 핀치.”

해롤드의 옆에서 존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고 핸드폰을 꺼냈을 때, 느리고 낮지만 분명하게 놀슨의 목소리가 해롤드의 귀에 들렸다. 떨리다가 겨우 뜬 두 눈이 핀치를 향하고 있었다. 

“해롤드.”

“놀슨. 눈 좀 떠봐. 괜찮나? 자네?”

“병원, 은 안되네. 병원은 안돼. 경찰도 안되네.”

“놀슨!”

“약을, 약을 좀 많이 먹어서,”

그리고 놀슨은 다시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은 놀슨의 머리맡에 한 웅큼씩 들어간 약봉지가 어지럽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해롤드는 다시 죽은 듯이 눈을 감은 놀슨을 내려보았다. 약하지만 분명히 숨을 쉬었고, 다친 곳도 없었다. 존은 말없이 약봉지가 어지럽게 놓여진 위로 방금 초 단위를 달리 한 전자 시계를 주먹으로 부쉈다. 존의 손에서 산산조각이 나야 할 것은 이 집안 어느 곳에도 있었다. 존이 도청장치를 찾아 박살내는 동안 해롤드는 한숨을 쉬며 놀슨의 몸 위로 담요를 끌어 덮어 주었다.


 

“솔직히 이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일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하지마, 쇼. 이것도 충분히 재밌는 일이야.”

“FBI 털어서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나오는 거? 차라리 핀치의 대학시절 얘기나 더 듣고 싶은데.”

총알이 떨어진 탄창을 비우고 다시 꽂아 넣으며 쇼가 말하자 루트가 매력적인 미소로 화답하며 쇼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보다 더 재미있는 우리 이야기나 하는 게 어때?”

“지금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건 존한테 겁없이 입술을 들이댄 키스도둑의 이야기야.”

“사민. 이렇게 치정 이야기를 좋아하다니 귀여운 거 알아?”

“내 치정이 아니니까 말이지.”

“너와 내가 치정으로 얽히면 그렇게 웃으며 얘기 못 할걸.”

“날 죽이기라도 할거야? 네가?”

“너와 내가 아니면 누구든 죽이겠지. 어쨌든 유쾌하지는 않네, 다른 이야기를 하자, 쇼.”

“아담 타일러를 왜 다시 데려가는건데?”

쇼의 질문에 다시 날아오는 총알들을 피해 몸을 숨기며 루트가 자신의 옆에 잔뜩 겁에 질린채로 손이 묶여져 있는 남자의 허벅지를 발 끝으로 지그시 눌러 밟으며 웃었다. 

“FBI에게 다시 곱게 돌려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놀슨이 눈을 떴을 때에는 해롤드 대신 위압적으로 잘생긴 남자가 그의 앞에 앉아있었는데 저도 한 때 덩치나 얼굴로 밀리지 않았다고 자부 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상회하며 심지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에 일절의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은 무감한 태도가 더욱 더 놀슨을 겁먹게 만들었다. 그러나 존은 친절하게 대해달라는 핀치의 당부를 잊지 않고 이제 막 깨어난 놀슨을 향해 굳은 입가를 끌어올려 웃었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 내가 죽은거요?”

핀치의 부탁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미소를 지우며 존이 대답했다. 

“제가 저승사자가 아니니까 그럴 리가 없을 겁니다. 선생님은 잠시 쓰러지셨어요. 혈압약을 과다복용하신 것 같은데 왜 그러신 겁니까?”

“해롤드는?”

“핀치는 오늘까지 커피를 맞으면 정말로 입을 재킷이 없어서요.”

“핀치가 되었나.”

놀슨이 느리게 말하게 다시 침대 위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놀슨에게서는 단념한 사람 특유의 상실감이 읽혀졌다. 존은 그런 것을 읽는데 능숙했다. 그러나 모른 척하기는 더더욱 능숙했다. 존이 물었다. 

“해롤드를 잘 알고 계십니까?”

“만난지 한시간 된 복지국 직원한테 커피를 쏟으려면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지 아시오?”

“안 해봤습니다.”

“해롤드 렌으로 알았지.”

존은 묵묵히 놀슨의 입이 저절로 열리기를 기다렸다. 인내는 유도 심문을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첫번째 덕목이자, 예상 외의 결과물을 가져다 주는 최적의 수단이었다. 놀슨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해롤드가 죽었다고 생각했소. 졸업하고 나서 해롤드를 수소문 해 봤는데,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지. 그래서 나타났을 때 다른 사람이 나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소.”

“… …”

“아니면 해롤드가 나를 놀리고 있거나.” 

놀슨은 낮게 웃었다. 존은 여전히 의자에 기대고 있는 채였다. 

“안 변했더군. 해롤드는. 무섭게도 말이야. 순식간에 지난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말이야, 해롤드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지.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았어. 잘 안되더군. 첫사랑은 죽을때까지 잊을 수 없다더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 말을 실감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나.”

“… 해롤드가 뭐라고 했습니까?”

“뒤늦게 사과하더군. 해롤드와 같이 일한다고 하니까 알겠지만, 해롤드가 먼저 사과하는 일은 드물지 않나. 사과 할 만한 일을 만들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게 했던 짓도 사실 해롤드가 의도적으로 만들었던 일이라고 생각했지. 사십 년을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오, 근데 어제 갑자기 그러지 않겠나. 미안하다고, 실수였다고.” 

“실수였다고요?”

“사십 년만에 화가 나더군. 사실 나한테 화가났던 거지. 사십 년간 그 일을 잡고 있었던 나에게. 심지어 해리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까지도 말이야.”

“무슨 실수였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존이 묻자 한참을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던 놀슨의 탁한 눈동자가 힘겹게 돌려 존을 바라보았다. 놀슨은 아까보다 경계하지 않은 시선으로 존을 바라보다가 너그럽게 웃었다. 

“자네인 것 같군.”

“무슨 말씀이시죠?”

“해롤드를 실수하게 만든 사람 말일세.”

존이 무엇인가를 더 물어보려고 할 때, 존의 허리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잘은 진동음을 내며 울렸다. 존은 놀슨과 핸드폰을 번갈아 보다 말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가져다 귀에 댔다. 총탄 소리와 함께 해롤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존! 거기에서 나와요! 지금 곧 FBI가 갈 겁니다!'

“뭐라고요? 놀슨은 어쩌고요?”

'놀슨은 괜찮을 겁니다. 카터가 개입할 수 있게 해 뒀어요. 911에 연락해 뒀으니 놀슨은 911에서 인계해 갈 겁니다. 당신은 일단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해요!'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존을 보고 놀슨이 말했다. 

“해롤드는 실수하는 사람이 아니지.”

“911이 올 겁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기억하게. 해롤드는 실수하지 않네. 그러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면.”

“… …”

“혹시나, 하는 의심이 생기면 그대로 행동하게.”

더 놀슨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존이 황급히 사라져 텅 빈 의자를 바라보며 놀슨은 존이 나간 방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가녀린 후회의 한숨을 내 뱉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랬다. 

리스의 발자취를 끊임없이 추적하던 FBI는 해롤드 렌의 존재의 근처까지 추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전혀 해롤드에 관한 발자취조차 찾아낼 수 없게 되었던 순간, 아담 타일러에 관한 익명의 제보를 받게 되었고 아담 타일러를 집요하게 조사가 시작되고 놀슨 타일러의 MIT 학적부와 관련된 기록을 뒤져보게 된 결과 이제는 세상에 사라지고 없는 해롤드에 관련된 학적부 기록을 찾게 되었다. MIT의 해롤드의 기록과 존 리스와의 상관관계를 찾지 못했지만 아담 타일러와의 사건과 별개로 놀슨 타일러의 존재가 FBI 및 수사당국에 알려지는 순간 해롤드의 지워버린 존재가 다시 추적될 수 있는 위협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계가 나를 이 쪽으로 다시 보냈던 거에요. 아담 타일러를 탈출시키는 사이에 놀슨 타일러는 해롤드가 준비한 여권으로 유럽에서 남은 여생을 편하게 보낼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결국 놀슨은 가해자였던 겁니까?”

“관련자이자, 비 관련자였죠. 기계의 입장에서 보자면 해롤드에게 치명적인 가해를 입힐 수 있는 관련자였으니 우리에게 번호를 넘겼던 거고요, 수사당국에 아담 타일러의 번호가 넘어간 시기를 비교해보니 FBI에서 추적을 시작한 지 8시간만에 해롤드가 놀슨 타일러의 번호를 받았어요. 정확히 FBI가 놀슨의 학적부에 대한 추적을 시작하면서 부터였죠.”

“아담은 어떻게 됐죠?”

“쇼가 적당한 곳에 버려둘 거에요. 놀슨이 비행기를 타면 FBI에서 다시 아담을 데려가야 할 테니 멀리 가지는 못 할 거에요.” 

루트의 간단한 설명에 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루트는 해롤드를 대신하여 게시판에 붙여 둔 놀슨과 아담의 사진들을 하나씩 떼고 있었다. 일이 거의 끝나가는데도 해롤드가 보이지 않았다. 존은 다시 루트에게 물어보려던 찰나, 루트가 뒤를 돌아서 존을 마주하고 상쾌한 어투로 말했다. 

“기계에게 멍청한 질문을 했다죠, 존?”

“… 기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기계는 정확하지 않은 주체의 질문이라 오류로 판단했죠. 대개 기계도 못 알아들을 질문을 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거든요. 제 기준에서는 그래요.”

“… 열흘 전 도서관에서 나한테 키스한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봤습니다.”

“증거도, 용의자 특정도 없이 정황으로만 질문했군요. 무슨 의미인지 잘 알겠어요.”

“기계가 그 날 기록도 보여주지 않고 있어요.”

“도서관 기록에 직접 접근하는 건 해롤드만 가능해요. 저도 불가능하죠”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말입니까?”

“정확한 기록에 접근하는 건 그렇죠. 그러나, 아예 기계에게 대답을 듣지 못할 건 아니에요.”

“무슨 말이죠?”

“질문 방식을 바꾸면, 기계가 근접한 대답을 해줄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이해가 안 되는데요.”

“오, 저런.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에요. 존.”

루트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들을 반으로 찢어 쓰레기통에 그대로 밀어 넣었다. 놀슨에게 바뀐 신원과 비행기 티켓, 그리고 약간의 재산을 전달해주고 해롤드가 올 시간이었다. 존은 유쾌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의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루트를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문을 밀어 열고 나가려던 루트가 말했다.

“해롤드가 오면 연락달라고 말해요, 나는 이대로 오하이오에 갈 거에요. 쇼가 오면, 쇼는 내가 연락할게요. 그리고 존.”

“… …”

“상황을 보지 말고 사람을 봐요. 대개 답은 사람에게 있으니까.”

**

놀슨의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던 것은 자신이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애를 써도 놀슨의 기숙사 방문을 두드리고 반쯤 열린 방문 너머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놀슨에게 분에 찬 얼굴로 마구 말을 쏟아냈던 것도 자신이었다. 

“꽃이 안 핀다구!”

“해리, 해롤드.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준 가짜 제비꽃씨앗 말이야. 꽃이 안 피어나. 싹만 조금 나다가 죽어버린다고.”

왜 인지 몰라도 해롤드는 매우 분노했으며 놀슨은 그 분노가 바로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해롤드의 감정에 발 맞춰 줄 자신이 없었다. 일년이 넘는 시간동안 보답 받을 수 없는 짝사랑에 자신은 충분히 지친 상태였다. 겨우 마음을 접고 자신을 달래느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짝사랑은 양초같은 것이라 자신을 태우고 나니 남은 게 촛농 뿐이라 그거라도 끌어안고 살아야 했으므로 놀슨은 해롤드까지 들여 볼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가 해롤드가 찾아왔다. 해롤드에게서는 약간 술냄새가 났다. 

“술 마셨어?”

“꽃이 안 피어. 타일러. 나는 영원히 저걸 꽃피우게 하지 못 할거야.”

해롤드는 약간 절망한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귀여운 눈가를 늘어뜨리고 원망하느라 달싹이는 것이 귀여우면서도 안타까웠다. 내가 너를 왜 좋아했더라, 지식과 자신감으로 꽉 들어차 있으면서도 어딘가 텅 비어 보이는 그늘의 간극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래서 마음을 주고 또 주고 주다 못해 나를 삼켰을 때 쯤에야 알았다. 내가 닳아졌음을. 놀슨은 칭얼거리는 해롤드를 끌어안았다. 해롤드는 순순히 끌려들어와 안겼다. 

“그럼 다른 꽃을 심어봐, 해롤드. 그건 피어 날 거야.”

“어떤 꽃?”

해롤드는 정말인지 너무나 귀여웠다. 

“어떤 꽃이든, 무엇이든 말이야. 해롤드.”

“… 너 말고 누가 또 나에게 꽃씨를 줄 사람이 있을까?”

없을지도 모르지. 있더라도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아, 해롤드. 왜냐면 나는 아직 손톱만큼 지나간 봄의 끝자락만큼은 너를 좋아하고 있거든. 나는 네가 좋아, 해리. 해롤드는 자꾸만 놀슨의 품을 파고 들었다. 다시 그 꽃씨를 줄 수는 없는 거야? 놀슨은 해롤드의 몸을 꽉 끌어안고 동그란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사랑의 끝자락이 지나가는 순간은 그렇게 아프고 귀여워서 자꾸만 끌어안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롤드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아, 우리는 여기까지는 할건가 보다. 해롤드. 너는 내게 이 정도까지는 내어줄 참이구나. 슬프고 귀여운 내 첫사랑. 봄이 채 지기도 전에 이렇게 떠날 건가 보구나. 


 

“사실 한번 꽃을 피웠어.”

“그랬나?”

“예쁘더군. 자네가 나에게 줄 만한 꽃이었지.” 

해롤드의 말에 놀슨이 웃었다. 놀슨과 나란히 앉은 버스 정류장의 대기의자 위에서 해롤드가 잘 돌아가지 않은 고개로 놀슨을 바라보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환한 표정이었다. 

“또 한번 내 실수로 놓치고,”

“… …”

“또 꽃 씨앗이 굴러들어왔을 때는, 이제는 정말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

“자네는 정말 못된 주인이야.”

버스가 들어왔다. 놀슨의 앞에 먼저 서있던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고, 놀슨과 해롤드도 같이 몸을 일으켰다. 놀슨은 몸을 돌려 해롤드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이 지나 노쇠해 졌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달라지지 않은 해롤드가 그 자리에 여전히 그대로 서 있었다. 놀슨이 말했다. 

“해롤드.”

“… …”

“자네는 실수하지 않잖나.”

해롤드는 놀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적당한 온기가 나뉘어 졌고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하자, 놀슨도 얼마 안되는 짐을 움켜쥐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을 가만 보고 서 있던 해롤드가 다시 놀슨의 이름을 불렀다. 놀슨이 옆을 바라보며 해롤드를 바라보았지만, 해롤드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 웃으며 배웅해 줄 뿐이었다. 줄은 자꾸만 줄어들어 놀슨이 이윽고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날 놀슨의 침대 위에서 잠을 깬 다음 날 아침,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해롤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놀슨이 주었던 제비꽃의 씨앗을 다시 찾아내는 일이었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뒤져 흩어진 꽃 씨앗들을 하나씩 손 위에 올려 두었고, 그것들을 가지고 가 다시 화분 안에 흙을 조금 파내고 묻어 두었다. 여러 개를 한꺼번에 묻으면 그 중에 하나를 꽃 피우리라, 하나는 얼굴을 내밀리라. 

그리고 다시 놀슨을 마주쳤을 때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놀슨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텅 빈 구멍을 매만지며 해롤드는 제비꽃이 피길 기다렸다. 그러나 꽃은 끝내 피어나지 않았다. 놀슨이 아버지의 회사에 인턴을 위해 메사추세츠를 떠나던 날까지도 꽃은 여전히 피어나지 않았다. 해롤드는 화분을 버리지 못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는데도 피어날 리 없는 화분을 여전히 창가에 두었다. 
 

**

맹세코 CIA 퇴직 이후 가장 심각한 상태로 존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해롤드의 컴퓨터 모니터 앞이었지만. 갖은 노력과 공을 들여 해롤드 컴퓨터의 패스워드를 풀었지만 도서관의 기록을 살피는 일은 여전히 그보다 더 견고한 장벽 같아서 아예 시도를 해 볼 생각조차 없었으므로, 존 리스는 생각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한참은 까만 프롬포트창을 바라보다가 유려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10일 전 도서관 입술 박치기 사건]

[오류입니다.]

[3월 27일 도서관 도청청취기록]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밤 10시 이후 도서관 출입관련 기록]

[왜 찾으세요.]

“해롤드, 당신 기계 고장 난 거 맞다니까요.”

철옹성같은 모니터를 앞에 두고 존 리스는 머리를 쥐어싸고 신음했다. 철저히 관리자 위주로 만들어진 기계는 관리보다 더한 철벽을 자랑했으므로 존 리스가 떠볼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존은 반드시 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했다. 존은 고통에 신음한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조용히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약 올리듯 커서가 깜빡이는 곳에 시선을 쥐어박고 얇은 입술을 깨물었다. 

<해롤드는 실수하지 않네.>

<질문을 좀 바꿔서 해보는 건 어때요?>

<혹시나, 하는 의심이 든다면 그대로 행동하게.>

존은 조심스럽게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려두고 조심스럽게 한 글자씩 쳐 내려가기 시작했다. 

해롤드 핀치는 배웅을 마치고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쇼가 버려 둔 곳에 FBI가 아담을 찾아 데리고 갔다는 의문과 함께 루트에게서 놀슨 타일러의 사망처리 소식을 동시에 확인했다. 자신의 유능하고 인간의 한계점을 살짝 넘어가 있는 팀 멤버들은 각자 흩어져 있다가 자신이 부르면 언제든지 돌아올 터였다. 그 때까지 해롤드는 자신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었는지 이제는 케이스를 하나씩 해결하고 나면 긴장이 빠져나가 몸이 으슬으슬 아파오기도 했다. 존이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일단 도서관에 들어가 베어의 상태를 보고 연락할 참이었다. 사적인 안부로 존에게 연락하려면 아직까지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했다. 다 늦게 시작한 짝사랑이라 생각이 더 앞서다 보면 하지 못한 행동들이 부지기수로 남았다. 

“베어.”

도서관 안으로 들어오며 해롤드는 베어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 같으면 타닥이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해롤드는 더 목소리를 키워 베어의 이름을 불렀다. 사무실로 다가가자 베어가 언제나 앉아있어야 할 베어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해롤드는 주위를 둘러보고 가벼운 재킷을 벗어내려 걸쳐 두었다. 모니터가 깜빡이고 있었다. 누군가 만져 둔 것이 분명했다. 가끔 베어가 의자위에 올라가 해롤드의 키보드와 싸움을 할 때도 있었으니, 베어의 짓인가 생각하고 해롤드가 잠시 미간을 찌푸릴 무렵 모니터 안의 글씨가 비로소 선명하게 읽혀졌다. 

“… 신이여.”

[3월 27일 밤 11시부터 12시 해롤드 핀치 GPS 기록]

[3월 27일 밤 11시 45분경 해롤드 핀치 GPS 기록]

[[기간지정] 관리자의 최대 오류]

애초에 도서관의 관리기록에 대한 정보를 제한해 놓은 것이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한하지 않았다. 궁금해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질문을 해 놓은지 얼마 안된 것인지 깜박이던 커서가 스스로 움직여 답을 내놓았다. 

[[기간지정] 관리자의 최대 오류]

[도서관 관리 기록에 의거 자산 제 1호 존 리스와 성애적 교감을 나눈 바 있음. 상세내용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꽉 벅차 올라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턱 막혀서 해롤드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떨었다. 

“해롤드.”

그리고 어둠의 저 너머에서 존의 목소리가 들렸다. 존이 알았다. 이 사실만으로 해롤드는 당장이라도 모니터의 전원을 모두 내리고 싶을 만큼 끔찍한 기분이 되었지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존이 다시 해롤드의 이름을 불렀다. 

“해롤드.”

부정하고 싶은 기분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시기의 개화는 감동보다 괴로움에 가까웠다. 해롤드는 천천히 다가오는 중압감에 저도 모르게 숨이 턱턱 막혔다. 목 끝까지 긴장이 차올라서 괴로웠다. 어둠에 가려졌던 존의 모습이 반쯤 보일 때쯤, 해롤드는 소리쳤다. 

“여기로 오지 마세요, 미스터 리스!”

“핀치.”

“제발, 제발 여기로 오지 말아요, 부탁입니다. 미스터 리스.”

두번 째 개화가 시작되었다. 봄날의 꽃향기가 환후처럼 잠식했다. 해롤드의 부탁에 원래부터 무감했던 존이 어둠밖으로 나와 해롤드에게 다가올수록 더 그랬다. 코 끝으로 개화의 향기가 났다. 그토록 닿아지고 싶었던 그 봄에 사로잡힌 그 날밤으로부터 정확히 10일만의 일이었다. 

 


 

관리자의 치정사건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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