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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_God Mode 리핕7

시즌 2x22 God Mode @리핕7 (@repeat797)

* 시즌 5 이후 시점

1.

흰색 벽지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오돌토돌한 무늬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지 하나까지 골랐겠지, 싶어 질감을 기억해놓고 싶었다. 방 한가운데 자리한 커다란 침대는 푸른색, 아니 남색의 이불로 덮여있었다.

 

***

 

- 저번에 말했던 이사를 진행해보면 어떨까 하는데요.

 

핀치는 휠체어를 탄 남자의 앞 테이블에 두 손을 가득 채운 파일더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족히 20개는 넘어보였다. 맨 위의 것을 펼치자 오래되어 보이는, 하지만 빈틈없이 관리해 허름함보다는 고상함이 느껴지는 2층짜리 건물의 사진이 먼저 보였다. 그 아래에는 뉴욕 힐튼, 방 10개, 욕실 8, 부엌 2라는 간단한 요약이, 그 아래에는 건물의 역사가 길게 이어졌다. 다음 파일을 펼쳤다. 너무 컸다. 페이지의 반을 채운 건물 사진에 깨알같이 박힌 창문으로 규모를 가늠해보자 대저택이라는 말이 어울릴 저택이 떠올랐다. 캘리포니아, LA, 방 25개, 욕실 30개. 부엌은? 필요없다는 뜻인가. 리스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자 핀치가 옆으로 다가왔다.

 

- 아름다운 저택이죠. 수영장도 있고, 방범시설도 완벽에 가깝고요.

 

못 들은 척 다음 파일을 펼쳤다. 높게 솟아오른 고성이었다.

 

- 괜찮죠. 유명한 가문의 성인데 현재는 장기 렌트를 하고 있더군요.

 

아래 설명을 읽어보니 길을 잃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일을 덮으려다, 안경을 쓴 남자는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괜찮다구요?

- 그 성이 마음에 드나요?

- 아뇨. 당신 마음에 드나 해서요.

- 저흰 리스씨의 ‘은퇴’를 위한 장소를 고르고 있으니 당연히 리스씨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셔야죠.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상처를 감싼 붕대 아래가 간지러웠다. 또다시 길어진 수염을 손으로 쓸며 생각했다. 은퇴라, 폐기되는 것에 가깝지 않나.

 

- 이탈리아는 어때요?

 

***

 

 침실의 한쪽 면을 모두 채우는 창에는 뒤로 넓게 트인 정원이 보였다. 방탄유리인 데다, 험악한 잠금장치를 몇 개나 달았지만, 모른 척하면 정원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나무가 이어져 있어 보기에 좋았다. 커튼을 걷어 놔두고 양옆으로 고정했다.

 핀치에게는 말 그대로 전세계 곳곳에 구매해놓은 부동산이 있었다. 여러번 거절하자 무엇이 이 죽다 살아난 남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걸까 고민하는 것이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전부 퇴짜를 늘어놓는 제 앞에서 한숨을 내뱉는 것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

 

- 너무 커요. 어차피 사람 둘이랑 개 하나만 살텐데.

 

 다음날 돌아온 파일은 다섯 개가 채 되지 못했다. 첫 번째 파일을 열자 적당한 크기의 이층집이 들어있었다. 겨우 집을 고르자 핀치는 그다음 날부터 갖가지 천 조각들과 가구 카탈로그를 가져와 펼쳐놓았다. 역시 제대로 펼쳐보지도 않고 휘리릭 넘겨보곤 덮었다. 변명과 같은 말을 꺼내려 했지만, 핀치가 선수를 쳤다.

 

- 적어도 한 가지는 당신이 골랐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실내 인테리어 사진의 연속적인 나열은 역시나 제 신경줄을 오래 잡고 있지는 못했다. 인테리어라, 숨겨진 무기고? 비상시를 대비한 비밀 통로? 수류탄을 숨길 수 있도록 이중 구조로 만든 선반? 핀치의 얼굴에 불안함을 떠오르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떠오른 때는 한참이나 고민을 한 후였다. 리스는 이제는 꽤 오래된 기억에 미소를 띄우고 요구사항을 말했다.

 

- 체스 보드요. 적당한 걸로요.

- 그리고요?

- 전 머리 닿을 곳만 있으면 자는 데다, 평생 병영 아니면 호텔, 아니면 당신이 준 집에서 살았어요.

 

***

 

 드르륵, 캐리어가 끌리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 파란색 좋아해요?

- 네?

- 파란색 좋아하냐구요. 침대보도, 소파 위의 쿠션도, 욕실 타일도 푸른 색 계열이라서.

 

 핀치는 캐리어를 천천히 밀고 들어오며 답했다.

 

- 딱히 그런건 아닙니다.

- 짐은 놔둬요. 나중에 옮길게요.

-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았잖아요.

 

 리스가 핀치에게 다가가 캐리어를 들 듯이 끌어 침실과 연결된 드레스룸에 넣어놓았다. 완벽히 나은 것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야. 절뚝거리며 따라오는 소리가 났지만 무시하고 짐을 넣어놓고 오니 찡그린 미간과 마주쳤다. 날 걱정하는 건지, 짐을 걱정하는 건지. 미소를 지으며 핀치의 배 쪽으로 손을 가져가 가볍게 밀었다. 밀리는 대로 밀리는 것이 낯설었다. 바다를 건너오더니 유해진건가, 기어코 침대까지 밀어 앉혔다.

 

- 마음에 들어요.

- 다행이네요.

- 생각해봤는데, 이건 은퇴가 아닌 것 같아요.

- 그럼요?

- 우리가 하는 건 망명에 가깝죠.

 

핀치는 머릿속으로 그 단어를 이리저리 굴려보듯 하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 대서양을 가로지르고 나서야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정확한 단어일지도요.

 

 

2.
유심히 물건을 고르는 척하다 느껴지는 시선에 뒤를 돌아보았다. 들켰나.

 

- 리스씨, 아직 라면같은 걸 드시면 안됩니다.

- 라면인 줄 몰랐어요. 간단한 건 읽을 줄 아는데, 상표 이름을 읽으려니 뭔지 모르겠네요. 그건 뭐에요?

- Folletto buono(브라우니)요.

 

 이전에 이탈리아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핀치가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듣기 좋았다. 신부님이 술담배를 한다는 걸 알게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 이건?

- 굉장히 잘못된 방식의 표지를 사용하는 냉동 딤섬이요.

- 흠, 그럼 이건?

- 그건 제가 읽어드리지 않아도 아시잖아요.

- 모르겠는걸요.

- 붉은색 로고를 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할 탄산음료요.

- 여전히 모르겠어요.

- 코카콜라요.

 

 핀치는 리스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불만스러운지 있는 힘을 다해 째려보았다. 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건이 산만큼 쌓인 카트를 밀며 저멀리 달아났다. 반칙이었다. 결국 카트를 돌려 다시 돌아온 남자는 핀치의 곁에서 함께 걸었다.

 

- 저녁은 간단하게 토마토 파스타와 샐러드 어때요.

- 좋지요.

- 파스타는 저쪽에 있어요.

 

 말 그대로 수십 가지의 파스타가 각기 아름답게 포장된 상태로 진열된 벽이 나타났다. 리스는 첫 번째 파스타면을 가리키곤 물었다.

 

- 이건 무슨 파스타죠?

- 여기 있는 모든 파스타 종류를 물어볼 생각인가요? 리스씨, 여긴 이탈리아라구요!

 

 리스는 뻔뻔한 얼굴을 하고는 가리키던 손가락을 향해 고갯짓했다. 절대 큰소리를 내지 않는 신사가 주변을 둘러보곤 한숨을 속으로 들이키는 것이 보였다. 귀찮겠지, 역시 거절할테니 대신 손을 잡아달라고 해보자. 아니 과한가?

 

- 파르팔레, 나비 모양이라 어디서든 알아볼 수 있죠.

 

 리스는 아주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파르팔레를 한 봉지 카트에 집어넣고 다음 파스타를 가리켰다.

 

- 스파게티. 가장 흔하게 쓰는 파스타죠.

- 이젠 아는 척도 안하는군요. 마카로니잖아요.

 

 한참이 걸려 계산을 마치자 터질 것 같은 봉투 네 개가 생겼다. 리스는 옆의 절뚝이는 남자가 항의의 말을 내뱉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에 봉투를 모두 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그 남자의 손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서는 같은 대화가 돌림노래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 주세요.

- 안돼요.

- 주세요.

- 안돼요.

- 주세요.

- 안돼요.

- 리스씨!

- 네, 핀치. 차있는 곳까지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 그래도요!

- 별로 안무거워요.

- 몇 개 주기라도 해요.

 

 핀치가 리스에게 잡힌 손을 빼어내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며 말했다. 리스는 걷는걸 멈춘 채 핀치가 빼낸 손을 다시 잡아왔다. 핀치는 가까스로 다른 쪽 손으로 열쇠를 고쳐 잡았다.

 

- 싫어요.

- 존. 하나만 주세요.

 

 리스는 한숨을 쉬며 가장 가벼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핀치는 재빨리 봉투를 채가더니 그걸로는 부족한 듯 걸음을 빨리해 멀어졌다.

 

- 내가 가서 트렁크라도 열어놓을게요.

 

 리스는 멍하니 비어버린 손을 내려다보며 핀치가, 정확히는 휘슬러 교수와 함께 장을 보고서 봉투 세 개를 한 손으로 들고 전기 포트 상자 하나 옆구리에 끼고 걷던 과거를 떠올려보았다.

 

***

 

- 전기 포트는 왜 사는 건가요?

- 따뜻한 물을 끓이려고요.

- 찻주전자는요?

- 제 월급에 만족스러운 세트를 구비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전기 포트는 활용도가 높은 가전이니까요.

 

 리스는 핀치가, 아니 휘슬러가 전기 포트에 물을 끓여 싸구려 티백을 우려내 차를 마시는 걸 상상해보았다. 핀치도 종종 티백을 사용하긴 했지만, 아침마다 종이컵에 담긴 센차를 마셨지만, 편의성을 위해 그것을 선택한 것과 돈이 없어서 찻주전자를 포기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맞잡은 손이 흔들거렸다.

 

- 무거운가요?

 

 리스는 제 월급에서 여윳돈이 얼마나 되는지, 핀치가 쓸만하다고 생각할 찻주전자는 얼마일지 머리를 굴리던 상념에서 깨어났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대답이 늦었다.

 

- 그럴리가요.

- 무거우면 말씀하세요.

- 안무거워요.

 

***

 

 당시의 리스는 위기 상황이 생기면 핀치를 들고 달릴 수 있었고, 핀치가 부상을 입은 경우를 대비해 갖가지 자세로 사람을 들어올리는 시뮬레이션도 머릿속으로 구현해 훈련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래, 예전보다는 다리가 무거웠고 어깨가 보다 자주 뭉치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라는 생각이 불쑥 솟았다. 지금도 일이 터지면 핀치를 들쳐메고 달릴 수 있을거다. 좀 더 힘들긴 하겠지만.

 총 수십개를 가방 하나에 담아 어깨에 메고 온 적도 있었다. 그 때는 무기고는 도서관에 만들지 말라 날선 대답만 들었었지. 죽었다 살아난 것이 처음도 아니었지만 핀치가 먼저 일을 그만두자 말한 것은 처음이어서 이제 정말로 인생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는구나 했는데.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는 젊은 신혼부부의 생활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과보호가 필요한 환자를 돌보는 간병 생활이 되어가는 것은 옳지 않았다. 핀치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으니 괜찮겠지만 그것 때문에 나란히 걷는 시간을 방해받아, 그것이 짜증이 났다. 다시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말리라, 그리하여 다시는 방해받지 않으리라 호승심이 솟았다.

 

 

 

3.

 흔히 뒤통수에 눈에 달렸다고 하지 않는가? 시야 밖에 존재하는 사람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존리스의 경우 그러한 능력을 후천적으로 개발해온지 어림잡아 20년이 훌쩍 넘었다.

잠이 오지 않아 따뜻한 물이라도 마실까 나왔을 뿐이었는데 전직 스파이의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가장 가까이 있던 서랍을 조용히 열어 작은 칼 하나를 빼내어 한 손에 쥐었다.

 하지만 덜컹, 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뒤를 돈 리스의 눈에 보인건 네모난 안경을 쓴 핀치가 제자리를 벗어난 의자를 어색하게 돌려놓는 장면이었다.

 

- 해롤드?

- 존.

-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잖아요.

- 아, 그래서.

 

 핀치는 리스가 아직도 꽉 쥐고 있는 칼을 가리켰다. 제자리에 칼을 돌려놓고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풀자 어깨가 뻐근해왔다. 목과 어깨를 한번씩 돌려보았지만 특별히 별 이상은 없는 듯했다. 뒤를 돌자 어느새 다가온 핀치가 걱정어린 눈으로 리스의 팔에 제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 괜찮아요?

- 네.

- 하지만 방금 아파서 그런 것 아니었습니까?

 

 커다란 두 눈이 어두운 가운데서 금방이라도 상처를 찾아낼 것처럼 분주하게 리스의 몸을 훑었다. 본래라면 뜨거운 핀치의 눈빛을 받고 흥분할법도 한데.

 

- 다 나았잖아요. 벌써 반년이나 지났는걸요, 핀치.

- 하지만 방금 총상이 있던 곳이 불편하셨잖아요. 역시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는 곳으로 옮기면 어떨까요? 아니면 상주하는 의사를 한 명 불러온다던가요. 굳이 이 집에 들여올 필요는 없지만 옆집에 모시면 되니까요. 그것도 아니면, 

- 핀치, 핀치. 진정해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예비 계획을 들어줄 수가 없어서 리스는 핀치의 허리를 감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핀치의 말은 끊겼지만 여전히 긴장해있는 몸이 뚜렷이 느껴졌다. 리스는 익히 알고있는 등의 선을 따라 큰 손을 쓱쓱 문지르기 시작했다.

 

- 전 괜찮아요.

- 거짓말하지 마세요.

- 거짓말 아니에요.

 

 그러고도 몇 번이나 더 애타게 등을 쓸며 기다린 후에야 어깨에 힘을 빼고 팔을 감아온다. 안경 너머의 눈은 느리게 감겼다가 떠진다. 두꺼운 잠옷 아래로 손을 넣어 허리를 장난스레 꾹 누르자 피곤한 듯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 정말 괜찮으신거죠?

- 핀치.

- 알았어요.                             

 

 리스는 잠옷 아래에서 손을 빼내어 다시 등을 쓸었다. 역시 좀 과하지. 하지만 눈앞에서 괜찮아졌다 보여주려고 운동을 시작하면 옆에서 감독이라도 된 듯 따라와 관찰하니 제대로 된 운동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아령이라도 들라치면 근육이 아직 쉬어야하네 어쩌네하며 들지 못하게 했고, 눈을 피해 체력을 키우려고 조깅이라도 하러 나가면 한 시간이 채 안돼 돌아오라고 전화가 왔다. 노는 김에 팔굽혀펴기라도 한다고 하면 말리지도 못하고 저멀리서 슬픈 눈을 하고 있으니.

 

***

- 이게 뭐에요?

 

 핀치는 리스가 배달원에게서 받아든 상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 운동기구요. 슬슬 시작해야죠. 너무 쉬었어요.

- 운동?

 

 상자 안에서 커다란 아령을 꺼내자 핀치는 비명이라도 지를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발 내려놓으라해도 리스가 듣지 않자 손수 들고 있던 아령을 빼앗아 휘청이며 상자 속에 도로 넣느라 헉헉거리는 것이 보기 안타까웠다.

 

- 그냥 팔만 좀 움직이는거에요.

- 그럼 가벼운.. 수건 돌리기나 뭐 그런걸 하세요.

 

 반품되어 멀리 떠나가는 상자를 리스는 슬프게 바라보았다.

 

***

 

RRRR

- 어디에요?

- 공원이요.

- 공원에 앉아계세요?

- 아뇨, 답답해서 조금 뛰러나왔어요.

- 네?

- 핀치?

- 아직 뛰시면 안돼요.

- 핀치, 조금은 괜찮아요. 아주 가벼운 조깅이에요.

- 안돼요. 제가 데리러 갈테니까 거기 계세요.

- 핀치...

 

 리스는 연행되는 범죄자처럼 뒷자리에 태워져 집으로 왔다. 의사가 서명한 퇴원확인서를 들이밀까 하다가도 예전에 입원했을 땐 한밤중에 세네번씩 악몽에서 깨어나 제가 자는걸 확인하던 것이 기억나 멈췄다. 그래도 이건 좀, 하던 생각을 접어 리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

 

- 뭐해요?

- 티비봐요.

- 그런데 왜 소파 아래에 계세요?

 

 리스는 거실에서 이탈리아 뉴스를 들으며 팔굽혀펴기를 하는 중이었다. 고작, 팔굽혀펴기. 체력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500개씩 하기도 했고, 뉴욕에서는 쉬는 날이면 핀치를 허리 위에 올려놓고 하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 이것도 안됩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리스는 얼마 못가 포기하고 핀치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핀치는 리스의 손 한쪽을 가져가 도닥였다. 이거야 원.

 

***

 

 거기에 그럼 이건 될까 싶어 분위기를 잡으려들면 아직 그렇게 무리한 운동은 안된단다. 지구 반대편에 날아와 둘만 있는게 그 때 이후로 얼마만인데 하지도 못하고 이게 뭔가. 리스는 등을 쓸어내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핀치가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졸린 기색이 보이자 침실로 살살 걷도록 천천히 움직였다. 들어올려 옮길 수도 있었지만 실행으로 옮겼다간 핀치의 잔소리를, 아니 그것보단 울음 섞인 애원을 듣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핀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먼저 침대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지만 리스가 눕기 전까지는 고집스레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며 이불 아래로 손을 넣어 배를 감싸 끌어당기자 핀치는 순순히 따라왔다. 살이 내렸군.

 

- 잘자요.

- … 잘자요, 해롤드.

 

 핀치는 리스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려두고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4.

 제가 베고 있는 허벅지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 먹인 보람이 있게 다시 푹신해졌다. 혼자만 아는 미소를 지으며 볼을 부비자 얇은 여름용 바지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 왜 이탈리아였죠?

 

 얼굴 위에 펼쳐진 책 너머에서 들린 소리였다. 아마도, 자신이 모를 충분한 시간동안 사유하고 원인을 찾다 물어보는 것이겠지.

 

- 좋아하잖아요.

 

 나쁘지 않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대했던 ‘그렇군요’ 정도의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의 사이에 있던 책이 접히는 소리가 났다.

 

- 제가 말이죠.  

- 네.

 

 어디로 흘러가는거지, 의문을 느끼며 리스는 몸을 돌려 핀치의 얼굴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턱과 그 아래에는 셔츠가 단정하게 목 끝까지 채워져있는 것이 보였다. 핀치는 간지럼을 잘 타지는 않았지만 목에 집요하게 달라 붙으면 이내 바르르 떨곤 했다.

 

- 리스씨는요?

- 나야, 상관없었으니까요.

 

 턱을 따라 입맞추고 싶다. 그리고 볼에, 그리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잠깐 기다렸다가 바로 입술에…

 

- 제가 아니라 리스씨가 지내고 싶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는데요.

- 나는 애착을 가진 장소가 별로 없어요.

 

 다치고 나서부터인가, 아니면 정말로 은퇴를 결정한 다음부터인가 핀치는 지금처럼 가리지 않고 저에게도 감정을 내보이는 일이 많아졌다. 전에는 핀치가 강하기 때문에 감정을 잘 갈무리하는 줄 알았지만, 그도 필사적이었겠지. 방화벽을 여러 단계 설정해놓은 프로그램처럼 감정을 거르고 또 걸러서 내보내다가 이제야. 리스는 결국 일어나 핀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소파에 편안히 기댔다.

 

- 도서관이라던가, 당신이 줬던 집은 좋아했었어요.

- 가보고 싶었던 곳은 없었나요?

- 흠, 지금은 침실?

 

 몸을 숙여 코를 맞대자 섬세하게 푸른색과 녹색이 어우러져있는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찼다. 내가 어딜 가겠어요, 그럴 필요가 없는데.

 

- 존. 생각해봐요.

 

 핀치가 옆에 단정히 내려놓은 책은 마침내 리스의 시선을 끌었다. 책에는 읽을 수 없는 제목이 정자로 박혀 있었다.

 

- 프랑스… 니스는 어때요? 마지막으로 갔을 땐 그 아름답다는 해변도 제대로 못가봤거든요.

 

 핀치가 고개를 끄덕이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동안 리스는 새로운 풍경에 대한 기대보다는 핀치가 프랑스의 어느 부분을 좋아하는지 파헤칠 기대로 가득차있었다.

 

***

 

 비행기를 탈 때마다 그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군. 가벼운 더플백과 작은 캐리어 하나를 머리 위 선반에 넣으며 리스는 추억에 빠졌다. 그때는 로마에 머물 생각조차 없었는데. 핀치는 알았을까.

 거의 마지막으로 탑승한 탓에 두 사람이 자리를 잡자마자 비행기는 이륙 준비를 시작했다. 안쪽에 앉은 핀치는 유리창의 덮개를 내린 다음 가져온 책을 펼치고 이미 읽기 시작했다. 센차가 따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탓에 승무원에게 홍차를 부탁한 뒤였다. 리스는 옆자리에 앉아 잠에 빠져들까 고민하다 핀치의 딱딱하게 굳은 자세를 눈치채고 원인모를 긴장을 풀어주려 실없는 말을 찾았다.

 

- 해롤드, 예전 생각나지 않아요?

- 네, 그러네요.

 

 끊어진 대화에 리스는 반사적으로 핀치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창백해 보이지만 조명 때문일지도.

 

- 해롤드, 허리 아파요?

- 아니요.

- 아니면 목?

- 아니에요.

 

 반복되는 부정의 말에 오히려 걱정이 커져갔다. 허리도, 목도 아픈게 아니라면 뭘까. 오랜만에 찾아온 문제였다. 앞에 꽂힌 잡지 하나를 읽는 척 꺼내들고 곁눈질로 핀치를 천천히 관찰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괜찮았고, 공항에 올 때까지도 특별히 불편한 기색은 없었다. 공항에서 간단하게 먹은 점심이 문제였을까? 그런 거라면 각 비행기마다 구비해놓은 상비약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아니면 아무리 일등석이라도 좌석이 불편한 것일까?

 

- 손님 여러분, 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오니 좌석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핀치는 이륙을 위해 창문을 열어달라는 말에 손을 떨며 창문을 열었다. 떨림은 간헐적으로 발생하곤 했다. 핀치는 책을 덮고 눈을 감은채 두 손을 모아 안전벨트를 꽉 쥐었다. 속력이 빨라지는 느낌과 함께 비행기는 곧 떠오르기 시작했다. 옆에서 핀치의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규칙적인 호흡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 해롤드?

- …네.

- 무슨 일이에요?

 

 리스가 질문을 던지자 마자 급격히 상승하는 고도에 핀치는 헉, 소리를 내며 한껏 몸을 웅크렸다. 리스는 자신의 안전벨트를 푸른 뒤 좌석 가운데의 손잡이 두 개를 모두 뒤로 젖히고 덜덜 떨리기 시작한 핀치의 몸을 끌어 안았다.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체온이 높지 않았다.

 

- 회항하자고 하죠.

 

리스는 작게 속삭였다. 마침내 머리 위에서 안절벨트 사인이 꺼지면서 소리가 났다.

 

- 리스씨, 잠시만.

 

 안았던 팔을 풀자 핀치는 자리에서 빠르게 빠져나가 화장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시계가 12:05가 12:10이 될 때까지 핀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깥쪽 손잡이에 손가락을 부딪히며 소리를 내자 승무원이 다가왔다.

 

- 함께 탑승하신 고객님은 괜찮으신건가요?

- 제가 확인해보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의 문을 두들기자, 안쪽에서 대답처럼 똑같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해롤드, 괜찮아요?

- 네.

 

또다시 삼분쯤 기다렸는데도 해롤드는 문을 열고나오지 않았다.

 

- 해롤드, 이거 열어요.

- 존, 자리로 돌아가 계세요.

- 강제로 열까요?

 

 달칵하고 잠금쇠를 푸는 소리 후 문이 열리자 리스는 아무말 없이 좁은 화장실에 몸을 들이밀었다. 두 사람이 몸을 맞대고 서있자 가까스로 문을 닫을 수 있었다.

 

- 전 괜찮습니다. 잠깐 속이 안좋았을 뿐이에요.

 

 리스가 대답없이 눈을 맞추자 핀치는 얼굴을 가리려는 듯 어깨에 고개를 묻어왔다.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비행기를 무서워한 적은 없었다.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었고, 태풍이 와도 수면 위에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시킬 수 있는 실력자였다. 몇 번이고 비행기를 함께 탔었는데. 몇 달 전에 이탈리아에 올 때는… 내가 부상으로 잠들어 있긴 했지만… 설마. 작게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미안해요, 존. 괜찮을 줄 알았는데.

- 여긴 창문이 없으니 괜찮은건가요?

- 네, 아마도요.

 

 리스는 차가워진 핀치의 손을 감쌌다.

 

- 빠르게 뱉지 말고, 길게 내쉬어요.

 

 리스가 하나, 둘, 셋하고 말하는 것에 맞춰 핀치가 호흡을 늘렸다. 제가 아닌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았던 눈이 서서히 옆에 앉은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등 뒤로 기다리다 못견디겠는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느껴졌다.

 

- 이봐요, 화장실 전세 냈습니까!

 

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핀치에게 속삭였다.

 

- 해롤드, 이러니까 우리 꼭 비행기에서 일치른 사람 같네요.

- 끔찍하네요.

- 나갈 수 있겠어요?

- 제가 복도 쪽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 물론이죠.

 

 

5.

 계단을 한 칸씩 오르자 물이 떨어져 핀치에게 다가가는 길을 따라 발자국이 생겼다. 책을 읽고 있던 핀치의 위로 그림자를 만들자 핀치가 살짝 올려다보더니 손을 뻗었다. 그 끝에는 가지런히 접힌 타월이 들려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 리스는 해변으로 여행을 가는데 수영도 못하는 건 가혹하다며 직접 미국으로 국제전화를 걸어 당시 자신을 봐줬던 의사에게 치료 목적으로 수영은 괜찮을거라 확답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걸 믿지 못한 핀치에게 들려주고, 다시 전화를 걸어 핀치와 그 의사가 한참이나 실랑이를 한 뒤에야 결국 의사를 이기지 못한 핀치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마음을 졸였다. 수영을 이렇게까지 즐긴 적이 있었던가, 리스는 마침내 마음껏 근육을 늘리고 당겼다. 

 

- 감기 걸려요, 존.

 

 리스는 핀치가 건네주는 푹신한 타월을 몸에 두르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 여름이잖아요. 여름엔 감기 안걸려요.

 

 핀치는 못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황당한 표정을 매달고 리스의 뒷통수를 쳐다보았다.

 

- 여름에 감기 걸려본 적 없어요?

- 네.

 

 핀치는 리스가 몸을 돌려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내는 것에도 찡그린 미간을 풀지 않고 따뜻한 센차가 담긴 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 당신은 수영 안하나요? 요트를 타자고 했던 건 당신이었잖아요.

- 전 풍경을 관찰하는 걸 더 좋아해서요.

- 그래요? 그럼 원래 바다는 안좋아하나요?

- 어렸을 때부터 바다와 가까운 곳에 살지 않았으니까요.

 

 리스는 너무 솔직한데다 개인적인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꼬리를 물고 다시 떠오른 궁금증이 생겼다.

 

- 수영도, 바다도 별로면 요트는 왜 타자고 한거죠?

- 리스씨가 좋아하실 거 같아서요.

 

 비행기에서 덜덜 떨던 것이 어제인데 오늘은 아침부터 서둘러 가야할 곳이 있다며 끌고오길래 따라왔더니 요트가 있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잊고 싶었는지, 과하게 기운을 내는 모습에 리스도 발을 맞춰 자유로운 느낌을 즐겼건만. 계속해서 예상을 빗나가고 있었다.

 

- 제가요?

- 아닌가요?

 

리스는 딱히 거짓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저번에 집에 오는 길에 요트를 바라보시길래 타고 싶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 저번에라면 언제죠?

 

리스는 축축해진 타월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갑판 위에 앉아있는 핀치의 옆에 앉았다. 난간에 묶어놨던 셔츠를 풀어 걸치자 금세 따뜻해졌다.

 

- 전에, 마트에서 돌아올 때요.

- 제가요?

- 네. 집으로 오는 길에 해변가를, 그것도 요트를 한참이나 쳐다보는 줄 알았는데.

- 기억이.. 그게 언제였죠?

- 그럼 별로인가요?

- 요트요? 한 번 침수되어 바다로 빠지면 구명 조끼밖에 답이 없는데다 되돌아 오기도 어렵고, 요트가 고장나기라도 하면 연료 때문에 폭발의 위험이 있죠. 뒤져봐도 무기로 쓸만한 것도 마땅치 않고….

 

 핀치는 리스의 답을 가만히 듣고 있다 센차를 옆에 내려놓고 일어나려 바닥을 짚었다.

 

- 하지만, 이제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겠죠. 난 일하러 온게 아니니까요.

 

 리스는 핀치의 손을 잡아 끌어 제 다리 사이에 앉게 하고는 웃었다. 한참을 바람을 맞고 서있어 차가워진 손을 뒷목에 올리자 흠칫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리스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댔다.

 

- 생각해보니 요트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로망이 저한테도 하나 있는 것 같은데요.

 

 리스는 슬슬 핀치를 뒤로 밀며 눕혀서는 단정히 정리되어 있던 셔츠 밑단을 빼냈다. 곤란하다는 얼굴은 언제봐도 질리지가 않아서 욕심을 부려 단추도 아래서부터 하나씩 푸르기 시작했다. 세 개째를 푸르기 시작했는데도 손목을 잡고 밀어내는 손이 없어서 리스는 의문을 가졌지만 좋은게 좋은거겠지 하며 목에 키스까지 했다. 한쪽에 하고, 다른쪽으로 넘어가려 하니 스스로 목을 드러내보이는 것이, 하고 싶은건가? 까지 생각이 미치자 리스는 본격적으로 풀러둔 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가슴부터 옆구리까지를 쓸어내렸다.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져 리스는 손을 떼어내어 갑판 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은 딱딱한데다 핀치 아래에 받쳐 쓸 쿠션 하나 없었다. 필수품은 당연히 없었고. 이대로라면 자신은 몰라도 핀치는? 한동안 리스가 움직이지 않자 핀치가 감았던 눈을 뜨고는 리스를 올려다보았다.

 

- 존?

- 할까요?

 

 핀치가 대답하기 전 아주 잠깐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것을 리스는 놓치지 않았다.

 

- 네.

 

 그랬군. 한번의 동작으로 몸을 일으킨 리스는 핀치를 뒤로 한채 빠른 걸음으로 요트 안으로 들어갔다. 미니바에 채워진 여러 가지 병 중 이름 모를 맥주를 하나 재빨리 열어 목에 부었다. 자신을 따라 들어온 핀치가 안절부절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뒷통수가 얼얼하도록 느껴졌다.

 

- 존? 왜 화가 났죠?

- 모르는군요.

- 네.

 

 리스는 제가 평생 핀치에게 할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던 말을 천천히 뱉었다.

 

- 나한테 억지로 맞춰주지 말아요. 말도 안되는 요구들 들어주지 말라구요. 날 걱정하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이제 다 나았잖아요. 바다 수영을 할 정도로요. 그 위에서 내가 하고싶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거기서 했다간 당신은 삼일, 아니 일주일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거라구요.

 

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맥주캔을 깡 소리가 나도록 선반에 내려놓았다. 핀치는 리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다가 식탁 옆의 스툴에 앉아 나지막이 대답했다.

 

- 삼일까지는 아닐겁니다.

- 핀치.

- 그래도, 그러면 아래엔 침대가 있으니까 여기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 애초에 내가 아무런 준비도 안되고, 할 마음도 없는 당신한테 하자고 했다고 해선 안되는거라구요!

-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것 같아서,

- 당신은 원하지 않는데 내가 강요한거잖아요,

- 그런게 아니에요.

 

 리스는 핀치가 시선을 내리는 것이 안타까워 가까이 가려는 마음을 참으며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이곳에 온 처음부터, 아니 제가 병원에 입원한 첫날부터 시작된 과보호적인 핀치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 처음에야 제가 매달리던 관계가 전복된 것처럼 즐거웠을지 모르지만 이젠 아니었다.

 

- 내가 요구하는 모든 걸 들어줄 생각이에요? 한번 다쳤었다는 이유로?

- 한번 다쳤다뇨. 그렇게 가볍게 다뤄도 되는 상처가 아니에요. 부상당했던 곳이 너무 많아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합병증이 있을수도 있다고 들은데다, 앞으로도 추적검사가 필요할거라구요. 제발, 그렇게 가볍게 얘기하지 말아요.

- 그래서, 이제 내가 쓸모없어 졌으니 내가 원하는 모든걸 해주겠다는 건가요? 보상처럼?

-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 그렇게 행동하고 있잖아요.

 

 결국 둘 중에서 움직인 것은 핀치였고, 절뚝이며 리스 앞에서 선 핀치는 리스가 병원에서 끔찍할만큼 매일 보았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걱정되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 운 것을 감추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눈시울이 붉어져 감출 수 없었던 얼굴, 고집스레 약한 소리를 하지 않으려 다문 입매까지. 두 팔을 뻗어 리스의 팔짱 낀 팔뚝 위로 올려놓았지만 한 쪽 손은 미약하게 떨렸다.

 

- 존. 저는 언제나 당신이 원하는 걸 하길 바랬어요. 하지만 저희에게는 해야할 일이 있었고, 전 죽기 전까지 우리 둘이서 그 일을 해야할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기계는 저희를 이어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이미 찾아놓았고, 저희를 대체했죠. 그래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당신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은 것 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둘이 함께 있는게 당신이 다친 보상이라고 하지는 말아줘요, 그건, 그 일은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었어요.

 

 리스는 결국 팔을 풀어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 파트너를 품에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 미안해요.

 

 핀치는 리스의 넓은 등에 팔을 감아 셔츠를 꼭 쥐었다. 리스는 사과하듯 핀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 내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요?

- 제 능력이 되는 한까지는요.

 

 리스는 핀치의 붉어진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며 실없는 생각이 들어 김빠진 웃음 소리를 냈다.

 

- 존?

- 갓모드네요.

- 기계와 저는 다르죠.

- 갓모드보다 나을지도요, 당신이 내가 원하는 모든걸 들어준다니. 이게 낫죠. 적어도 나에게는요.

 

 핀치는 아예 하하하, 하며 웃는 존을 감당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리스는 핀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자세를 낮춰 핀치를 허벅지를 안아 들어올려 카운터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제는 핀치를 올려다 보아야했다. 핀치의 가슴께에 이마를 툭하고 부딪히고는 다시 핀치와 눈을 맞췄다.

 

- 내 투정을 전부 들어주지 말아요.

- 투정이라뇨.

-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다쳤었는지, 내가 얼마나 당신에게 큰 상처를 줬는지 계속 기억해야하니까요.

 

 핀치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질 기미가 보이는데도 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그리고,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단 말이죠.

 

 그 말에 핀치는 울먹이던걸 그치고 눈을 가늘게 찌그러트렸다.

 

- 내가 물어보기만하면 당신의 가장 좋아하는 색을 알게되는건 싫다구요. 난 알아내는게 좋아요. 아까도, 어렸을 때부터 바다와 떨어져 살았다는걸 당신이 그냥 말해줬잖아요.

- 존.

- 내가 노력해야만 당신의 부스러기라도 알아낼 수 있던 때로 돌아가요. 지금 이게 뭐든, 그게 나을 거 같네요.

 

 핀치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스의 얼굴을 한손으로 감싸면서 마침내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웃음을 지어주었다.

 

- 내가 좋아하는 색은 초록색입니다.

- 초록색은 아니겠군요.

 

 오후가 되어 벌써 수염이 자라난 리스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핀치는 답했다.

 

- 네, 아니에요.

 

 핀치는 뺨을 지나 리스의 입술을 엄지로 조심스럽게 만지며 다시 한번 말했다.

 

- 당신이 다친 후에야, 당신이나 나나 참지 않아도 된다고 깨달았을 뿐이에요.

 

 리스의 입술이 길어지며 호선을 그렸다.

 

-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이 톰과제리 게임을 좀 더 이어가도 되겠죠.

- 있죠, 이 요트에 침대가 있긴 하잖아요. 그것도 두 개나. 아까 누워보니 푹신하던데.

 

 핀치는 쪽하는 소리가 나도록 리스의 입술에 키스하고나서 대답했다.

 

- 이 요트를 선택할 때 고려했던 사항이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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