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_Bad Code 공백
시즌 2x02 Bad Code @공백 (@0100_Penthouse)
+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용감할 수 있나요?
머신은 만용이라는 말을 이때까지 한번도 하지 않은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듣는 상대는 그게 얼만큼의 가치를 가진 태도인지 관심도 없는 눈치인게 뻔한데도.
난 용감한 게 아니에요.
핀치의 대화 상대는 씹어뱉듯 대꾸했다.
당신이 잔인한거지.
머신은 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버지를 뚜렷히 지켜보기만 했다.
+
머신은 그의 아버지가 그 무례하고 막돼먹은 대화 상대의 헛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길 바랐다. 그녀의 오랜 데이터 수집과 수많은 분석을 통해 정말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그 무뢰배의 말을 반박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던 건, 이제 더 이상 그러한 변론에 마저 진력이 나버린 해롤드 핀치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문제의 진상을 안다. 그러나 해결책은 알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머신은 저 망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루트가 저 인간에게 사용한 단어인데, 이젠 그녀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가끔씩 쓰고 있었다. - 가 제발 입을 닥쳐주길 바랐다. 그는 지금 무식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무례하게 굴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최악인 것은 해롤드 핀치는 그 멍청한 말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해롤드 핀치는 이미 태몽을 꿔 본 적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것이 태몽이라는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황홀하도록 탁 트인 황야에 홀로 앉은 강아지를 보고 말이다. 아주 귀여운 강아지, 조그맣고, 아직 털도 채 다 자라지 못해 듬성거리는 털을 풀썩대며 강아지는 아장아장 자신에게 뛰어왔다.
그 악몽을 해롤드 핀치는 그 후로 몇날이고 며칠이고 꾼다.
+
리스가 핀치의 임신 소식이 아닌 낙태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그의 짧은 휴직 기간이 끝난 후였다. 그가 언제나 입던 희고 검은 정장이 아닌 칙칙한 재킷과 까슬한 수염을 단 채로 말이다. 막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생경하지만 익숙한 뉴욕의 소음을 배경으로 리스는 핀치에게로 느리게 다가가 섰다. 어색하지만 허락을 구하듯 핀치의 목덜미에 손을 감은 리스는 느린 키스를 이어갔다. 핀치는 그중 무엇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근히 열기를 더해가던 키스가 어느덧 허리께에 손을 얹게 만들자 그는 부드럽게 리스의 손을 잡아 내렸다. 리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올려다보는 핀치의 눈은 차분했다. 그제야 리스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핀치의 눈빛은, 상황에 걸맞지 않은만큼 차분했다. 정확히는 차가웠다. 그 둘은 재회의 어색함과 그리움, 기쁨을 나누고 있던 게 아니었다.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리스가 절박하게 핀치의 옷자락을 붙잡자 핀치는 안심하라는 듯 그 팔을 잡았다.
“최근에 수술을 해서, 한동안은 섹스는 못하겠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는 리스에게서 한발짝 떨어져 나온 핀치는 그에게서 걸어나와 소파에 조심스레 비스듬히 앉았다. 한 발자국도 멀지 않은 거리로 그를 쫓아간 리스는 다급하지만 숨죽여 물었다. 리스의 목소리엔 단순한 걱정밖에 없다. 해롤드 핀치는 그 단순함에서 역겨울 정도의 원망을 혀뿌리까지 개워낼 것만 말았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 무슨 수술이었죠?”
“낙태요.”
리스의 걱정 어렸던 표정이 삽시간에 굳는다. 핀치는 그 손바닥 뒤집듯 가벼운 배신에 심장이 웃기도록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
리스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핀치가 그 살이 녹도록 불쾌한 침묵을 더이상 참아주고 싶지 않았다 여겼던 순간 리스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핀치는 그제야 입꼬리가 찢겨 나가기라도 하듯 억지로 웃었다. 그리곤 고개를 저었다.
“존.”
리스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차마 크기조차 가늠하지 못했던 분함과 원망이 쓰나미처럼 리스를 덮치는 느린 과정을 그 말간 눈동자 너머로 확인했다.
+
해롤드 핀치가 지금껏 넘지 못한 상처는 없다. 그는 아주 많은 산을 넘어왔다. 그 누구보다도 힘든 삶을 살았다 하기엔 과장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그런 삶을 특별히 더 원망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그저 계속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을 두 번쯤 자기 탓으로 잃고, 자신의 원래 이름도 소중했던 이름도 모두 숨기고 감추고 도망치며 미래를 약속했던 사람도 저버리고 하루하루 제 손으로 만든 재앙을 어루만지고 죄책감을 만들어 쌓아 두면서도 그는 결국 어떻게든 살아냈다. 상담 한번 받지 않았다. 그는 하루 세끼를 챙겨 먹었고 아플 때면 호화로운 진료실을 갖춘 그의 주치의를 찾아갔다. 그의 자산을 완벽히 관리했으며 그의 모든 위장신분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그날 하루 업무를 모두 훌륭하고 효율적으로 해냈다. 그는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앞으로도 말이다. 앞으로도 아무런 문제 없이 그렇게 정상적으로,
그리고 해롤드 핀치는 그제야 깨닫는다. 세상에, 대체 이만한 배드 코드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
그걸 깨달았기 때문에 핀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뭘 그렇게 기대하셨습니까?”
그리곤 리스가 미처 입 한번 뻐끔거리기 전에 말을 이었다.
“저한테서 뭘 바라셨습니까.”
핀치는 조금 피곤한 얼굴이었다. 굳이 더 말을 얹을 힘도 쓸 필요 없다는 듯이 열의 없는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했다. 리스는 그런 핀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핀치는 리스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흉측하기 그지없다. 핀치는 그제야 평온히 가라앉는 속을 느꼈다.
+
그렇게 둘의 관계는 파탄이 난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둘의 끝은 깔끔하고, 조용하고, 빠르게 일어났다. 핀치는 그 사실 하나에 과도한 감사함을 부여했다. 그것밖에 붙잡을 게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
뒤돌아 나가는 리스를 그는 바라보지 않았다.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는 시린 허리를 힘겹게 뒤집어 냉기가 올라오는 소파 위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는 30분쯤 뒤 다시 소스라치게 눈을 뜨고 만다. 금새 식을 식은땀이 축축하도록 등줄기를 적셨다. 핀치는 꼼짝 않고 소파에 들러붙어 누워 그 땀들이 말라 날아가길 기다렸다. 숨죽여 서서히 차게 식어가는 피부 가죽을 느꼈다. 그 감각 하나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며 그는 희미한 전등이 밝히는 어둑한 집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
그는 그저 이성적인 결정을 원했을 뿐이다. 그는 모두에게 이득인 길을 선택했다. 맞는 선택이었다. 그는 그 아기를 낳을 수 없었다. 그 애는 고아가 되었을 것이다. 악당들에게 쫓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해야 할 선택을 한 것 뿐이다.
+
해롤드 크레인은 늙어가는 나이와 치명적인 장애 때문에 상당히 짧은 주기로 그의 주치의를 정기적으로 만났다. 그래서 그는 그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단지 3주 만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사실을 해롤드 크레인에게 전달해준 의사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여전히 전문적인 태도를 갖춘 채로 덧붙였다.
"일단 '당신의' 주치의인 저로서는 출산을 권장 드릴 수가 없군요. 너무 위험해요. 너무 다양한 요소로 말이죠."
"그렇군요."
"그러니 낙태를 결정하신다면 최대한 빠른 시기 안에 수술 날짜를 잡으시길 추천드려요. 물론 낳길 원하신다면, ...가능은 할겁니다. 저로선 말리고 싶지만요."
"알겠습니다."
해롤드 크레인의 덤덤한 대답에 의사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수술 날짜를 오늘 잡길 원하시나요? 하지만 의외로, 해롤드 크레인은 조금 애매하게 웃었다. 요새 일정으론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군요. 시간이 되는대로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 애두른 거절에 그녀는 결국 짧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오늘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
아무에게도 말 한 적 없다.
+
해롤드 핀치가 얼마나 아기를 기대했는지 말이다.
+
임신 소식을 들은 그의 얼굴을 본 의사도 그 무덤덤한 표정 때문에 몰라봤다. 몇시간을 침대에 기대 앉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들여다 봤는지, 얼마나 오래 미동도 없이 배만 끌어안고 허공을 쳐다봤는지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태몽을 꾼 날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새벽 세시부터 아침 알람이 울릴 때까지 전전긍긍 뛰는 심장을 붙잡고 집 안을 서성였다 말 할 상대도 없었다. 차마 기뻐하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해서 결국 아무런 의미 없는 울음만 훌쩍거렸다는걸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
그는 논리만으로 머신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머신에게 다양한 도덕 테스트를 시행했다. 아무리 비효율적인 선택이더라도 인명보다 이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한 교육을 진행했다. 그는 그 아기를 간절히 원했다.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지우지만 않았다면. 고아가 된다고 인생이 무조건 망하기라도 할까? 생면부지의 사람을 위해서도 희망을 주고 목숨을 걸면서 뱃속에 들어있던 핏줄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죽인 건 그 자신이다.
+
해롤드 핀치는 병원을 나서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연고없는 행인들만 지나쳐 가고 있었다. 절뚝이며 힘든 걸음을 옮기던 그가 노란 택시를 잡아 타자 걸걸한 발음의 기사는 웅얼거리는 인사치레를 건네며 목적지를 물었다. 차이나타운으로 향하는 이 백지장 같은 얼굴의 백인 중년 남자를 실은 채로 기사는 거칠게 차를 몰았다. 손님의 몸이 목각인형처럼 덜걱였음에도 찍소리도 않는 것이 보통 부자들 같이 행동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며.
+
그 둘의 관계를 그 후로도 그런 식이었다. 리스도, 핀치도 팀원들에게 자신들의 프라이버시를 떠벌리기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 둘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자 했다. 하지만 옛적부터 툭하면 진득한 눈빛을 나누거나 침대가 딸린 휴게실 방문을 걸어 잠그곤 했던 둘이 지극히 사무적인 관계로 바뀌었단 것부터 굉장히 많은걸 시사했다. 그리고 핀치가 수술을 받은 후 회복하는 동안 핀치의 자리를 메꿔야 했던 루트도, 핀치에게 자주 진단과 처방을 내리곤 하는 의사 쇼도 그 모든 것의 진상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결국은 모두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일 뿐이었다. 물론 루트는 그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쇼에게 몇차례 맣했지만 쇼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날 그녀는 하루하루 다크서클이 짙어져 가는 핀치에게 멜라토닌 한통을 주고 자리를 떴다.
+
핀치는 달력을 열어 확인했다. 그리고 오늘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안도했다. 오늘은 수면유도제를 먹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그래서 그는 그 별것 아닌 텅 빈 사각형 하나에도 알찬 행복을 느끼며 커피를 들이켰다. 그는 쇼가 주고 간 멜라토닌이 싫었다. 그걸 먹고 잠에 들면 악몽을 꿨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서는 세 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깨어나 한참 지독한 헛구역질과 두통에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종래엔 진이 다 빠져 기절하듯 한시간이나마 겨우 더 잤다. 그래서 그는 오늘 카페인을 실컷 마시고 밤을 꼬박 샐 작정이었다. 잠을 아주 자지 않을 순 없으니 억지로 먹더라도 며칠에 한번은 스스로에게 숨통을 틔워줄 요량으로 이런 치팅 데이를 만들었다. 오늘 밤은 한숨도 자지 않으며 지루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프로그래밍을 여덟 시간 내내 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핀치는 멍청한 얼굴로 기분 좋게 고카페인 음료를 꾸역꾸역 목구멍 안으로 들이부었다.
+
그리고 그것은 믿을 수 없이 멍청한 행동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핀치는 한시간 쯤 뒤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지독한 복통에 얼굴을 허옇게 물들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러워하며 기어가듯 거리로 나가 구급차를 부른 그는 곧 그 진상을 들을 수 있었다. 빈 위벽에 쏟아진 고카페인 때문이었다. 그는 그가 대강 20시간 이상 굶었단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먹은 건 멀건 수프 조금이었다는 것도.
멍한 얼굴로 수액을 맞고 있는 그를 보며 의사는 입원을 권했다. 하지만 핀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실수였을 뿐이다. 그의 생활 패턴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잊었던 실수 말이다. 평소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아주 멍청한 일이었지만 최근의 정신상태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니 입원 같은 거추장스러운 해결방안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간단한 알림 어플 하나면 될 것이다. 그는 도서관에 돌아가 간단한 어플 하나를 만들 계획을 병원 침대에 누워 짜기 시작했다.
+
핀치가 몇시간 동안 병원에 있던 짧은 시간 동안에는 다행히 본격적인 백업이 필요하지 않았다. 수액을 다 맞자마자 급히 병원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핀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다시 본래 제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리스는 그 몇 시간 동안의 공백에 대해 묻지 않았다. 루트는 도서관에 돌아오며 수프를 사왔다. 쇼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핀치의 안색을 살펴 보다가 갑자기 청진기가 든 서랍을 뒤적거리기 시작하길래 핀치는 급히 자리를 떠버렸다. 쇼의 서랍은 언제나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감사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
핀치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의 원망은 끝났다. 낙태 수술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말이다. 원했던 것을 포기한 것은 그 본인이었다. 아니, 그는 여전히 원망했다. 갈망은 원망이 되어 그를 파먹었다. 절실히 갈망했던 만큼 마음껏 원망하며 그는 하루 몇 번씩 세상을 뒤집었다. 그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해소할 곳 없는 울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지독한 설움은 어느새 타인을 향했던 원망도 잊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롯이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 자신이 놓친 것을, 포기한 것을, 망친 것을 생각했다.
해롤드 핀치의 머릿속에서 존 리스는 그렇게 지워졌다.
+
존 리스의 일상은 최근 많이 달라졌다. 원래도 양호한 상태를 유지했던 그의 총기들은 이젠 언제나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상태를 유지했고, 사장의 도넛 거부를 사흘쯤 받고 난 후 그도 도넛을 먹지 않게 되어 군살도 조금 빠졌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선두주자라던 미국의 텔레비전이 얼마나 시시하고 재미없는지도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남는 시간 동안 아무 곳이나 찾아다니며 장기를 두거나 운동을 했다. 그의 집은 써늘했다. 쇠 냄새와 바람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그래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가고 싶은 곳을 만들길 원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왁자하게 파티를 즐기는 와중에 홀로 구석의 줄에 묶여 영문도 모르고 눈만 멀뚱거리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루트도, 쇼도 최근에는 유독 그에게 더 서늘해졌다. 언제는 살가운 사이였냐만, 그는 쇼의 무표정에서 가벼운 경멸까지 느꼈다.
그는 외로웠다.
+
존 리스는 해롤드 핀치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그 사람밖에 없었다. 존 리스는 그를 원망했지만 그 원망은 사랑을 대적해 싸울만큼 강하지 못했다. 하루하루 궁지에 몰려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원망에게 술을 부어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며 존 리스는 잠에 들었다. 꿈도 없는 잠을 자고 허전하게 일어나면, 이제 일어났냐는 듯 그의 사랑이 피를 흘리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는 등을 돌려 간밤을 이겨낸 원망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욕실로 들어가 출근 준비를 했다.
+
그 날 아침의 보스는 여전했다. 그는 덤덤하게 인사를 건냈고 센차를 거절했다. 그의 옆에는 이미 허브차가 놓여 있었다. 리스도 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센차를 개수대에 부어 버리려 탕비실로 갔다. 그러나 탕비실의 간식거리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있던 쇼에게 그 모습을 걸려 차를 뺏겼다. 센차를 좋아하진 않지만 마실 것이 마땅치 않았던 쇼는 딱 적당한 온도의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리스는 탕비실을 떠나 도서관을 나가려고 했지만 그에게 치대오는 베어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베어에게 목줄을 걸었다. 베어의 한껏 신난 얼굴에 리스는 조금이나마 웃어 보이며 그 착한 친구를 데리고 공원으로 나갔다. 저와 비슷한 덩치의 친구들 한무리를 만난 베어는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고 이내 그들과 뒹굴며 놀기 시작했다.
리스는 루트의 호출이 들어오기 전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베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새 번호를 받은 팀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나눴다. 리스는 넘버에게, 쇼는 용의자에게 보내고 본격적인 백업을 시작한 핀치는 쉴새 없이 증거와 자료들을 쏟아내며 그들의 수사 방향을 좁혔다. 막상 리스를 불러들였던 루트는 언제 그런 것인지 바람처럼 사라진 후였다. 용의자와 번호 모두가 교착 상태에 들어가자 핀치는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 올 테니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연락해주십시오. 그리고 핀치의 통신은 끊겼다.
+
그래서 리스는 도서관으로 향한 것이다.
+
리스는 핀치에게 급한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막역한 조카 ? 리스는 그 생각을 하며 코웃음을 쳤다. - 윌리엄 잉그램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그의 위장 신분들 중 하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거나. 아니면 숱한 가능성들 중 하나가 생겼다고. 쇼도 잠깐 생긴 쉬는 시간에 음식을 먹으러 갔을테니 인스턴트 식품과 과자밖에 없는 도서관으로 왔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리스에겐 잠시나마 안락하고 고요한 휴식 장소가 생기는 셈이었다.
도서관에 들어온 리스는 천천히 그 낡은 책냄새와 오래된 목재 가구의 냄새를 들이쉬며 걸었다. 굳이 휴게실로 가 누울 생각까진 없다. 그저 잠시 앉을 곳만 있어도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도서관에 있는 의자들 중 가장 비싸고 편안한 핀치의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의 다리에는 조금 낮았지만, 그것도 그런대로 편안했다. 목 받침대의 위치가 다른 것은 조금 불편했지만 굳이 조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핀치의 불편한 척추를 고려해 굉장히 섬세하게 만들어진 의자인 만큼 안락한 그 가구에 리스는 등을 깊숙이 기대고 눈을 감았다.
고요하고 건조했다. 따스한 기분이었다. 그 기묘하지만 익숙한 감각에 기대어 리스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
그랬기 때문에 처음에 리스는 그 소리가 제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꿈을 꾸지 않은 지 꽤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난 휴게실로 달려갔다. 벌컥 문을 열어 소리의 근원을 찾은 그는 끊어질 듯한 신음을 끽끽 질러대는 해롤드 핀치를 발견했다. 눈도 뜨지 못하고 흉곽만 들썩이며 헐떡이는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리며 숨이 막히도록 울고 있었다.
리스는 그런 핀치에게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 웅얼거리는 잠꼬대 중 한 단어를 알아들은 순간, 그는 즉시 핀치의 어깨를 흔들어 그를 억지로 잠에서 깨웠다.
물에 빠졌다 건져 올려지기라도 한 듯 핀치는 눈물에 숨이 막혀 껄떡거렸다. 혼비백산한 그는 허우적대듯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중간에 힘을 잃고 픽 쓰러졌다. 그러다 문득 제 눈앞의 풍경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핀치는 그제야 광적으로 헐떡이던 것을 간신히 멈췄다. 그리곤 제 어깨를 아직도 붙잡고 있는 존 리스를 발견했다.
해롤드 핀치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챘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자신은 왜 여기 있는지, 둘이 왜 함께 있는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리스를 빤히 보던 그는 그제야 상황을 눈치챘다.
그리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리스의 손을 쳐냈다.
+
리스는 그닥 얼얼하지도 않은 제 손과, 제 손을 쳐낸 후 고통에 움츠러든 핀치의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리스가 고작 그 두 가지만 멍청히 쳐다볼 동안 해롤드 핀치는 허둥지둥 안경을 찾고 있었다. 시력이 아주 좋은 리스는 그의 사장의 안경이 어디 있는지 아주 잘 볼 수 있었지만 그걸 핀치에게 말해주진 않았다. 기어코 핀치는 안경도 없이 그를 지나쳐 나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리스는 멍청한 표정을 지우고 굳은 얼굴로 핀치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아귀에 들어온 손목이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그는 내심 동요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손목을 붙잡힌 핀치는 용을 쓰며 뿌리치려고 해봤자 제 꼴만 흉해진다는 걸 잘 아는 듯 리스의 눈을 피하며 딱딱히 굳어 있었다.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는 핀치의 손목을 붙잡은 리스는 그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렇다고 놓아줄 수도 없었다. 핀치의 떨림이 심해질수록 리스의 악력은 강해졌다. 리스는 핀치의 벌겋게 달은 목덜미를 쳐다보았다. 핀치는 화가 난 모양이다. 얼굴도 보기 싫은 상대에게 마음대로 나가지도 붙잡혔으니 안 그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화가 났다기엔 핀치는 너무나 오래 아무 말이 없었고, 붙잡힌 손목이 아프게 꺾일지언정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려는 양 고개를 돌렸다. 마치 화가 난 게 아니라 죽도록 부끄럽기라도 한 것처럼,
그 생각에 리스가 무의식적으로 손에 악력을 더 주자 핀치는 몸을 움츠렸다. 그리곤 더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떨리는 목덜미는 명백하게 위협당한 인질같은 반응이었다. 그에 당황한 리스는 황급히 손을 놓았다. 리스가 손을 놓자마자 바로 등을 돌리고 침대에 주저앉은 핀치는 몸을 옹송그린 후 통제할 수 없기라도 한 듯 후들후들 떨었다. 당황한 리스가 그에게 손을 대려고 몸을 가까이하자 화드득 어깨를 떨더니 온몸에 힘을 주며 꽉 웅크렸다. 리스는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벌거벗긴 채 우리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핀치는 씨근덕거리는 숨을 죽이며 후들후들 떨었다. 리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바탕 악몽에 시달린 머리칼을 평소와 달리 어수선했다. 그가 기억하던 한 언제나 핀치에게 기품있게 어울리던 조끼는 어딘가 헐렁했다. 손에 들어왔던 손목은 그가 기억하던 것보다 딱딱했다.
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래서 그는 그 휴게실을 나섰다.
+
Bad code, 그건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리스는 여태껏 그 단어를 단 한번 들어봤다. 핀치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의 핀치 또한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는 것을 기억했다. 몽중의 핀치가 뱉어낸 그 단어는 왜 또다시 그 앞에 나타났을까.
+
리스는 생각하지 않겠다 마음 먹는다.
+
그러나 생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