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_One Percent 무기
시즌 2x14 One Percent @무기 (@BlueDimDark_)
리스는 평생 돈에 집착해본 적이 없다. 풍족하게 자라지 않았고 풍족하게 써본 적도 없었지만, 비슷하게 자란 많은 사람들이 ‘돈’을 인생에서 결핍된 무언가로 여기고 채우려고 애쓰는 것과는 달리 리스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왔다. 그런 면에서 그가 우연한 기회에 나랏일을 하게 된 것은 피고용인과 고용주 모두에게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훌륭한 공무원의 자질이란 그 사람이 교통부에서 일하며 고속도로를 닦든, 정보부에서 일하며 사람을 죽이든, 대개 비슷했기 때문에- 적은 돈을 받고 고된 일을 하되 그 이상을 탐내지 않는 것 말이다. 리스는 훌륭한 공무원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에도 정보부에 있을 때에도 그는 사욕을 채우기 위해 움직여본 적이 없었다.
리스에게 결핍된 것은 돈보다는 애정에 가까웠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삶은 그에게 그가 원하는 만큼 다정한 관계를 쌓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저 삶의 크고 작은 선택들이 그를 그쪽으로 이끌었을 뿐. 리스는 평생 드문드문한 인간관계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외로워했다. 그리고 그 드문드문한 인간관계에 남들의 몇배만큼이나 마음을 쏟았다.
그래도 어쩌면 리스는 조금 외롭더라도 이 땅 위에 사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돈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은 채 성실하게 일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일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에 뉴욕에서 일어난 일로 그의 삶은 크게 방향을 바꾸었고 그로부터 10년여 후 제시카 안트가 죽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리스는 제시카를 잃었을 때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인간관계와 그가 부여잡고 있었던 단 하나의 삶의 목적을 동시에 잃었다. 그래서 그는 삶을 마감하려고 했다. 조용하고 확실하게 아무런 방해 없이. 어차피 방해할 만한 사람도 아무도 남지 않았지만.
핀치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리스로서는 예상은커녕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 남자가 나타나 모든 것을 아는 듯이 굴었을 때 깜짝 놀랐다. 그러나 사실 리스가 정말로 놀라야 하는 지점은 그가 삶의 목적을 잃은 시점에 핀치가 불쑥 나타나 삶의 목적을 주었다는 점이 아니라, 핀치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전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핀치가 그에게 ‘오랫동안 지켜보았다’고 했을 때의 기간은 리스가 짐작할 만한 수준을 훨씬 넘어섰고, 핀치와 리스의 시간줄은 그들의 ‘공식적인’ 첫 만남의 시점에 이미 엉킬 대로 엉켜있었다. 그러나 리스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놀랄 뿐이었다. 기묘한 시점에 나타난 저 동그란 안경을 쓴 동그란 남자가 다 안다는 듯한 말투로 그의 인생에서 유의미한 두 가지 중 하나를 제공하겠다고 했으니. 대체 뭘 안다고? 리스는 미심쩍어했으나 결국 핀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핀치는 모든 면에서 리스의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핀치는 허풍을 떠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리스를 꿰뚫고 있었고, 기가 막히게 똑똑했고, 보기보다 독특했고, 전직 CIA인 리스보다 더 수상쩍었고, 기이할 정도로 리스의 구미에 딱 맞는 일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는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리스는 5개월간의 인내와 각고의 노력 끝에 핀치가 초거대 IT그룹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그가 그 회사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몰랐다. 리스는 살면서 돈이 돈을 낳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TV나 뉴스에 나오는 어설픈 부자가 아닌 진짜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도 처음 알게 되었다.
리스가 첫 일을 마무리하고 통장을 확인했을 때 찍혀있던 잔액의 숫자를 읽어보고 연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음달에도 그 다음달에도 같은 금액이 입금되었다. 어느날 리스가 핀치에게 금액이 좀 잘못된 것같다고 했더니 핀치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달부터는 그동안 들어오던 금액의 두배가 입금되기 시작했다.
“당신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예요?”
한번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스는 그것을 어떤 긍정의 대답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 정도의 뜻을 담은. 그날밤 그는 핀치만큼이나 똑똑했던 어느 과학자가 쓴 편지를 천만달러를 주고 샀다. 그리고 핀치만큼이나 똑똑하고 특이한 부자를 한명 더 만났다.
피어스는 어느모로 보나 상위 1%에 포함될 만한 사람이었다. 특히 리스가 그동안 겪은 사람 중에서 손꼽히게 재수없다는 점에서. 그것 하나는 핀치와 다르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부분은?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였다. 리스는 평생 자기가 표준분포도의 가운데나 그 아래 어디쯤에 위치한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의식해본 적이 별로 없었지만 최근엔 상위 1%의 지능과 상위 1%의 부, 상위 1%의 특이한 성격 사이에 어떤 연관점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고개를 드는 동시에 그 자신은 그 중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피어스는 기묘하게 핀치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토록 재수없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피어스를 좋아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리스는 언뜻 생각했다.
“피로기는 마음에 들던가요?”
한참 새로 사귄 강아지 친구와 놀던 베어를 불러들여 공원을 돌기 시작한 뒤 한동안 말이 없던 핀치가 불쑥 물었다.
“그 가게 피로기가 맛있긴 하거든요.”
그 말에 리스가 고개를 돌려 핀치를 바라보았다.
“가본 적 있어요?”
“몇번 정도요.”
“전세기로?”
그러자 핀치가 리스를 곁눈질하고는 보일듯말듯하게 웃었다. 리스도 아는 웃음이었다. 당연하다, 는 뜻을 담고 있는 웃음.
“그래서 맛은 있었나요?”
핀치가 다시 물었다. 리스는 그 물음이 어딘가 집요하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이 사람 설마...? 그는 시계를 부수던 발길을 생각했다. 단둘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간다고 했을 때 어딘가 언짢아보이던 표정을 생각했다.
“글쎄요.”
리스가 입을 삐죽였다.
“동행이 영 별로라 맛이고 뭐고.”
그러자 핀치가 옅게 코웃음을 쳤다. 리스는 슬쩍 눈치를 보고는 덧붙였다.
“당신이 같이 가면 또 모르죠.”
핀치는 진담인지 알아보려는 듯 리스를 힐긋 쳐다보더니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예약해두죠.”
마치 집 근처 밥집을 예약한다고 말하는 것같이 핀치는 말했다. 리스는 웃었다.
“무한한 자원을 갖춘 교활한 억만장자라...”
그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무심코 중얼거렸다. 핀치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몸을 틀어 그를 보았다.
“뭐라고 했죠, 리스 씨?”
리스는 대답은 하지 않고 핀치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멀리서 신나게 뛰어가던 베어가 발길을 멈춘 주인들에게 되돌아오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무슨 일 있나요?”
핀치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리스는 무언가 말할 듯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더니 금세 다시 벌렸다.
“혹시 생각해본 적 있어요?”
“뭘요?”
“당신이 이렇게.....”
리스가 말끝을 흐리며 손으로 핀치의 아래위를 가리켰다.
“이타적으로 굴지 않고,”
맙소사, 피어스가 한 말을 쓰고 있잖아.
“그저 돈 벌고 유명해지는 데에서만 재미를 찾았다면 어땠을지?”
핀치가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질문이 그래요?”
리스가 어깨를 움츠리며 한발자국 다가섰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당신이 다른 평범한 천재 억만장자들처럼 그냥 돈다발 위에 누워서 9시 뉴스에 나오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핀치가 찌푸린 얼굴을 더 찌푸리더니 갑자기 폈다.
“평범한 천재 억만장자라고 하면, 우리의 마지막 고객처럼요?”
똑똑한 사람. 리스가 슬몃 웃었다.
“이런 말을 하면 좋아하진 않겠지만, 당신과 피어스는 제법 닮은 점이 있거든요.”
그러자 핀치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날 욕하는 거죠?”
리스가 소리내 웃었다.
“당신이 그 친구를 그 정도로 싫어할 줄은 몰랐네요.”
핀치의 얼굴에 진심이냐는 표정이 떠오르자 리스는 장난은 그만둘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느릿하게 걸어 핀치 앞에 섰다.
“난 젊은 당신을 상상해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핀치를 내려다보았다.
“젊고 자신만만하고 원대한 꿈을 꾸는 당신을요.”
핀치의 표정이 다시 미묘하게 바뀌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늘 그렇듯 다문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했겠죠.”
리스가 중얼거렸다. 핀치의 미간에 일순간 주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목젖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옅은 콧김이 리스의 턱에서 흩어졌다.
“내가...”
핀치가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문을 열다 급히 닫았다. 그는 리스를 올려다보고 있는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젊은 시절에 피어스같았을 것같은가요?”
“안 그랬을 것같아요?”
리스가 되물으며 빙긋 웃어보였다. 핀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을 할 수 없었다. 가능했던 무수한 기회들, 매일매일 바뀌던 어린 시절의 꿈들, 어리석지만 피할 수 없었던 선택들, 후회와 미련과 체념, 그리운 얼굴들. 핀치는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기 위해 리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얼굴을. 네이슨조차도 핀치가 내성적이고 남들 앞에 나서길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핀치는 태어날 때부터 잘 벼린 칼이었다. 무엇으로도 무뎌지지 않고 어떤 것으로도 감출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밟는 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제나 날카롭고 빛이 났다. 불나방처럼 타인을 끌어들였다. 리스는 그 날카로운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칼날을 만지고도 손을 베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끔은 당신이 내겐 과분하단 생각을 해요.”
리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조심스레 핀치의 볼을 감쌌다. 핀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로 리스를 쳐다보기만 했다.
“어떻게 당신을 만났을까 싶죠.”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1% 확률이에요. 피어스가 한 말이 귓가에 울렸다. 에밀리의 알고리즘으로 파악하면 그쯤 돼요, 어떤 사람이 나랑 잘 맞을 확률이. 생각보다 높죠? 피어스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인간관계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라니까? 리스는 피어스가 그런 말을 하는 동안 손바닥 안에서 농구공을 이리저리 굴리기만 했다. 당신과 나도 제법 잘 맞을 수 있는데. 피어스는 그렇게도 말했다. 리스가 코웃음만 치자 젊은 억만장자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더랬다. 혹시 몰라요? 속궁합이 기가 막힐지도 모르죠. 리스는 농구공을 떨어뜨렸다. 피어스는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어젖혔다. 내가 왜 전직 정부요원들을 경호원으로 채용하는지 알아요? 밤일을 끝내주게 하거든. 당신도 기회가 있는데. 피어스는 농담처럼 진담을 했다. 내가 보기보다 눈썰미가 있거든요. 제법 구미가 당기지 않아요? 리스는 자기가 그 말에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피어스가 그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알을 몇번이나 굴리고는 하! 하고 웃은 건 기억했다. 당신 파트너. 피어스가 검지손가락으로 리스를 가리키며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냥 파트너가 아니군요. 맙소사, 내가 맞긴 맞았네. 한 이십년은 늦어서 그렇지. 그쵸? 그러면서 그는 떨어진 농구공을 주워 골대를 향해 아무렇게나 던지며 뒤돌아섰다. 파트너랑 한번 잘해봐요, 존. 나는 이십년 뒤에 다시 도전해보지, 뭐. 림을 통과한 공이 네트를 흔들고는 텅빈 코트 위에서 한참 통통거리며 튕겼다. 그 통통거리는 소리를 떠올린 리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내가 처음 만난 천재 억만장자가 피어스가 아니라 당신이라 다행이에요.”
리스가 농담처럼 말했다.
“피어스였으면, 다시는 억만장자와는 말도 안 섞겠다고 도망갈 뻔했지 뭐예요? 그러면 당신은 못 만났겠죠.”
핀치가 웃음을 흘렸다. 그는 슬쩍 리스의 손에 얼굴을 기대며 미소를 보냈다.
“존.”
핀치가 말했다.
“네, 해롤드.”
“난 그냥 평범한 천재 억만장자예요.”
리스는 웃었지만 핀치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하지만 당신은 평범한 전직 요원이 아니에요.”
그가 속삭였다.
“과분한 쪽은 납니다.”
당신은 내가 첫 억만장자일지 몰라도 나는 당신이 첫 전직 정부요원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당신 자리에 서있던 전임자는 당신같지 않았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당신이 당신이라서 나는 지금까지 이 자리에 서있는 거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당신이 나의 당신이게 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당신을 잃을까봐 겁난다고. 가느다란 말들이 가닥가닥 혀끝에 고였다. 핀치는 그 말들이 쏟아질까봐 입을 열지 못했다. 리스는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 숙여 입맞추었다. 그리고 혀끝에 고였던 말들을 들이마셨다. 그 말들에선 짭짤한 눈물의 맛이 났다. 그는 자기가 다시는 가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다정한 인간관계를 얻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생애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리스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에게 결핍되었던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