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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_Legacy 모퉁이

시즌 1x12 Legacy @모퉁이 (@fratremtuumadj1)

*323까지의 내용을 포함합니다.

 

리스와 헤어진 뒤 그가 등을 돌린 방향으로 도서관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무작정 발걸음을 내디뎠다. 베어는 평소와는 달리 초조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옆에서 묵묵히 걸어왔다. 인적이 드문 골목을 발견하고 잠시 숨을 돌리며 루트가 준비해놓은 봉투 속에 들어있던 내용물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약간의 현금, 해롤드 휘슬러라는 낯선 이름의 신분증 그리고 루트의 글씨로 추정되는 쪽지가 들어있었다. 휘갈겨 쓰여져 있는 글씨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간단한 설명조차 없었지만 어딘가의 주소였다. 그 어떤 기기도 사용할 수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지금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언제 작성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거리에 붙어있는 빛 바랜 지도와 표지판뿐이었다.

극도의 긴장된 상태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한참을 헤맨 탓에 다리에 힘이 점차 풀려갈 때쯤 겨우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높은 건물들에 둘러싸여 빛을 받지 못하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잠시 그 앞에서 멈추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긴장감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오른쪽 어깨의 총상의 통증이 욱신거리기 시작하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인 것을 확인하고서는 손잡이에 힘을 주며 계단을 올라갔다.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달갑지 않은 병원 특유의 냄새가 났다. 병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협소하고 구석진 곳에 있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을 품으며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해롤드 아저씨?”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오랜 친구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그리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윌이 서 있었다. 놀라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표현하느라 어색해진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보니 긴장감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고 동시에 어둠이 밀려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안개가 끼인 듯 불투명한 천장이었다. 이곳이 어딘지를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온몸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져 꾹 다문 입 사이로 신음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정신이 드세요?”

윌이 재빨리 다가와 자신을 부축하였다. 그리고는 옆에 놓여 있던 안경을 씌워주었다. 선명해진 시야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윌이 들어왔다. 조금은 야윈 듯 보였다.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더 이상 그가 알고 있던 평범한 보험회사 직원인 해롤드 렌의 모습을 가장할 수 없었기에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고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머리 속으로 정리하려고 노력했지만 결코 언어가 될 수 없는 진실은 달싹이는 입술을 넘지 못했다. 그때 윌이 자신의 상처를 살피면서 말했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지 않아요.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언제나와 같은 상냥한 말투에 그를 바라보니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그 미소는 네이슨과 꼭 닮았다 생각하였다. 

“언제 돌아왔니?”

“얼마 안 되었어요. 연락 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먼저 절 찾아오셨네요. 언제나처럼.”

윌은 짐짓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 너머로 피가 묻은 자신의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묻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고 자신 또한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에게 경고하듯 피로 얼룩진 네이슨의 얼굴이 윌의 얼굴에 겹쳐 보였고 입을 굳게 닫을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윌.”

결국 그에게 자신이 건넬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최선이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자신의 손 위에 윌은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저씨는 제가 곤란할 때마다 도와주셨죠.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어요. 그게 저에게는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따금씩 떨리는 자신의 손을 안정시키듯 덮고 있는 그의 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처음에 네이슨이 데리고 왔을 때에는 두 손으로도 자신의 손등을 가리지도 못할 만큼 작은 손이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자신의 손을 모두 덮을 만큼 자라 누군가를 살리는 손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힘들 때마다 어깨에 묵직하게 무게를 실어 격려해주던, 혼자만의 힘으로는 벅차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처를 입어가며 위험에 처해있던 사람들을 구하던 네이슨의 손과 닮아가고 있었다. 이 손을 잡고 있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 네이슨이었어야만 했다.

 “원하시는 만큼 머물다 가세요.”

자신에게 쉬라며 일어나며 멀어지려는 손을 놓칠 새라 힘주어 잡고는 말했다.

“오랜만인데 이야기 좀 나눌까, 윌?”

 

 

네이슨과 처음 만났던 이야기부터 같이 사고를 쳤던 이야기, 네이슨이 지겨울 정도로 해주었던, 하지만 행복한 미소 때문에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했던 윌에 대한 이야기 등 오랜만에 만난 친척끼리 할 법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윌은 그 모든 이야기들이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내며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말도 안돼. 아버지가 정말 그랬어요?”

때로는 네이슨의 목소리와 표정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웃음 속에 감추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네이슨의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들을 그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다. 만약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하더라도 네이슨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이것이 남겨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일찍 넘겨주었어야 했었는데, 자신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미련 때문에 그러지 못한 과거의 자신을 마음 속으로 질책하였다.

 

도서관에 어지럽게 붙어있는 사진들이 떠올랐다. 자신이 미처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진들. 죄책감의 형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가장 밑에는 네이슨이 있었고 자신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핀치, 그런데 왜 하필 여기에요?”

하루는 리스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순간 그가 건넨 도넛상자를 받으려는 자신의 손이 멈칫한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평온을 가장한 채 기술적으로 또는 행정적으로 가장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이라 대답하였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고서는 또 다시 물어왔다.

“평생 이곳에 머무를 건가요?”

새삼 자신이 이곳에 온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네이슨과 나누었던 날 선 대화들은 무뎌질 줄 모르고 이곳을 맴돌고 있다. 평생이라. 아마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그 동안 잊혀질 수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군요.”

리스는 그에 자신의 표정을 살피듯 바라보며 그렇군요- 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네이슨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를 자신에게만 머무르게 할 이유가 사라졌다.

 

한참을 이야기한 뒤에야 윌은 내일 보자는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돌아갔다. 어쩌면 마지막 인사가 될 지도 몰랐다. 창 밖으로 보이는 어둑어둑한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겼다. 어느 새 베어도 자신의 곁에 다가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가기 전에 자신의 품 안에서 사진을 꺼내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마지막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 네이슨.”

 

 

밤이 깊은 시각의 거리는 조용했다. 새벽의 차갑게 가라앉은 침묵이 고여있는 거리를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베어와 함께 걸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윌과 나누었던 시간을, 그리고 네이슨과의 시간을 곱씹었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시간들을 되짚어 올라가 보았다. 자신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지점까지 거슬러갔을 때, 네이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진짜 이름은 기억해?”

유일하게 거리를 울리던 자신의 발걸음 소리가 멈추었다. 대신 자신과 연결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끊어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고 그때마다 어깨를 움츠렸다. 검은 그림자로 뒤 덮인 발 밑이 한없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허무함이 느껴질까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침묵의 무게에 숨이 옅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문득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작은 금속물질이 생각나 꺼내어 보았다. 아직까지 한 번도 쓰이지 않았지만 이리저리 긁힌 흔적이 있는 총알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총알을 건네준 사람의 이름이 거칠게 새겨져 있었다. 

“존.”

소리 내어 부른 그의 이름은 총알에 닿아 하얀 입김과 함께 부서져갔다. 그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날 새겨진 이름이 희미하게 사라졌다 나타났다. 그의 마지막 목적이 될 뻔 했던 것을 그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 의미에 대한 자신의 질문에 그는 중심추가 되어 주고 있다 대답하며 그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은 자신의 손 안에 있다.

도서관에서 나오기 전 리스가 다급하게 자신을 잡아 세워 짧은 키스를 한 후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당신에게 맡길게요. 다음에 만날 때 돌려줘요, 핀치.”

한동안 그리워하게 될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금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과거를 헤매던 시간축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부디….”

계속해서 맴도는 그의 목소리에 답하듯 속삭이고는 입술에 총알을 가져갔다. 여전히 누군가의 뜨겁고 선명한 피를 원하는 그것은 차갑고 딱딱했다. 그를 다시 만나 건네줄 때까지 위태로운 자신을 잡아줄 그것을 다시 품 안에 넣고 검고 축축한 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들었다. 저 멀리 어슴프레한 빛 속에 일렁이는 그림자가 그의 인영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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