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_Judgement 콜라임
시즌 1x05 Judgement @콜라임 (@colaim_)
옛날 옛적에 한 인어와 인간이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했으며 사랑했고 헌신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도 악역은 있듯 둘의 사랑을 방해하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은 많은 사람들의 끝없는 핍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랑했습니다. 동화처럼 아름답지도 환상적이지도,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들처럼 불에 타듯이 뜨겁지도 않았지만 미지근하고 꾸준한, 그런 사랑을 했습니다. 인간은 아침 일찍부터 부둣가로 나가 인어가 해수면 위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는 그 시간이 좋았습니다. 인어는 저 바다 밑에서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인간을 맞이하러 헤엄쳐 올라가는 그 길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여느 이야기에도 끝이 있듯 인어와 인간의 사랑은 끝을 맺었습니다. 그들의 다름을 역겹게 여겼던 사람들이 인간을 살해했고 인어가 그 혐의를 뒤집어썼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잔인하게 살해당했는지 그의 허리와 다리를 잇던 긴 흉터가 아니었다면 아마 사람들은 평생 그가 실종됐다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인어가 인간을 살해했다고 믿었고 그 인어는 죽어야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인어들 쪽에서도 찬성표가 들렸고 결국 인어는 육지로 끌려나가 화형에 처해지게 됐습니다. 인어는 자신의 몸이 타들어 가는 그 순간에도 인간이 마지막으로 해줬던 말을 되새겼습니다.
“다음 생이 있다면 그 생에도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요.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싶어요.”
인어는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대답을 나지막이 읊조렸습니다.
“이번엔 내가 다가갈게요.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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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겼습니다. 내가 졌어요, 핀치. 그래요. 당신이 맞아요.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사랑해요. 그러니까 제발 살아만 있어요. 제발… 10분 아니 5분 내로 구급차가 올 거예요, 해롤드. 그러니까 제발..”
‘당신은 뭐가 그리 간절한 것인지 흐르는 눈물마저도 닦지 않고 말을 하는 건가요? 내가 당신에게 그리도 중요한 존재인가요? 나의 죽음이 당신을 슬프게 하나요?’
해롤드의 머릿속에는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할 질문들로 가득 찼다. 더는 고통마저도 느껴지지 않는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존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움직이지 않는 팔도 자꾸만 감기는 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주변의 총성과 사이렌이 귀를 저리다 못해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구급차가 도착한 모양이었지만 해롤드의 눈은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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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소독약 냄새에 눈을 뜬 해롤드는 새하얀 천장을 맞이했다. 다음으로는 자신의 손을 잡고 간신히 잠에 든듯한 존이 보였다. 마치 밤새 일을 하다 방금 막 잠에 든 것만 같은 몰골이었다. 해롤드는 자신이 며칠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존의 피폐해 보이는 얼굴, 정갈되어 있지 않은 머리카락과 들쑥날쑥 자라있는 수염이 하루 이틀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존을 깨워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에 누이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입을 여는 것조차 힘들어 목소리를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존..?”
“..? 해롤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아요. 보고 싶었어요.. 나를 알아보는 당신이… 말을 하고 움직이는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리스 씨... 의사요…”
작은 소음에 미치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존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리는 말이 해롤드의 신경에 거슬렸지만 멍멍한 귀가 단어들을 불분명하게 만들었고 욱신거리는 몸이 의사가 우선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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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롤드는 몇 개월동안 잠자코 병원에 입원해 있으라는 통보를 들었을 때 충격에 휩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휘슬러 교수가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거지만- 병원에 있어야 한다면 위험한 상황에 후방지원으로도, 지금 상황에서는 컴퓨터도 만질 수 없으니 아예 도움 자체가 되지 못했다. 큰 상실감에 빠진 해롤드였지만 무리해서 움직였다간 몸 상태가 더 나빠질 것을 고려해 잠시 팀에서 빠지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이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었다. 그래도 심심할 틈은 없었다. 쇼가 무슨 장르를 좋아하는지 몰랐다면서 장르별로 가져온 책들이 침대 옆에 쌓여있었고 틈이 날 때마다 병원에 들러 말동무를 해주는 존과 가끔씩 들려 체스 상대가 되어주는 루트 덕분에 오히려 바쁠 따름이었다. 하지만 혼자 남겨져 있을 때의 공허함은 어쩔 수 없었다. 모두가 가고 나면 그 방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곤 해롤드 뿐이었다. 늦은 밤, 달이 하늘 높이 떴을 때, 정적만이 가라앉은 방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왔다.
“오전에 이 방에 드나들던 사람, 경찰 맞지?”
아마 해롤드가 잠에 취해 사경을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공허함에 휩싸여 온갖 잡생각을 하다 잠자는 시간을 놓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입을 나불거렸다.
“그런 거 같던데. 설마 이 사람 범죄잔가? 자주 찾아오는 걸 봐서는... 흉악 범죄자..? 무섭다… 나 이 사람 진료 담당인데..”
“그건 아닐걸? 내가 돌아다니면서 잠깐 봤는데 손까지 잡고 막 분위기 장난 아니던데?”
두 남자가 속삭이며 낄낄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랑도 하자고 하면 할까?”
“우엑, 저런 늙은이가 취향이었어? 존중은 하는데.. 그것보다 너 게이였냐? 가까이 오지 마라. 더럽다ㅋㅋㅋㅋ“
“무슨 개소리야ㅋㅋㅋㅋㅋ 그냥 판타지? 그런 거지ㅋㅋㅋ 그럼 그 두 여자는 누구지? 설마 문어 다리야?ㅋㅋㅋㅋㅋㅋㅋㅋ늙은이 주제에 재주도 좋네. 갑분가?”
“아 그건 아닐걸? 셋 다 같이 들어가는 것도-”
해롤드는 귀를 막았다.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미개인들’
해롤드는 생각했다. 그리고 도대체 언제까지 저런 시선을 받아야 할까 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또 사람들의 시선에 그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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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지 말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오랜만에 해롤드를 보러온 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자신이 너무 오랜만에 왔나? 너무 끈덕지게 달라붙었나? 온갖 생각이 존의 머리를 뒤덮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리- 아니 라일리 형사님이 싫어서 이러는게 아니니까.”
“그럼 도대체-“
“걱정되니까요”
사실 모두 거짓말이었다. 존을 위하는 척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해롤드는 무서웠다. 더는 그런 눈빛은 받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매섭게 일렁이던 불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해롤드는 존을 사랑했지만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다. 아직 존을 믿지 못했다. 존이 전생의 기억을 찾지 않는 이상, 그를 믿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해롤드는 존이 전생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아픈 건 자기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기적이게도 해롤드는 존을 너무나도 사랑했으니까. 일그러진 리스의 얼굴이 점점 펴지기 시작했다. 해롤드는 토끼처럼 눈을 뜬 리스의 눈을 뒤로하고 입을 열었다.
“요즘 하루에 몇 시간 주무세요? 사실 여기 올 시간에 자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생각은 있는 건가요? 언제 사마리탄이 정체를 알아차리고 습격해 올지도 모르는데 최상, 아니 못해도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해롤드가 존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을 채로 말했다. 냉혹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사마리탄의 눈을 피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뜨는 번호를 지키러 가야 했기 때문에 잠은 잘 수 있을 때 충분히 자두는 게 가장 좋았다.
“안 그래도 오늘은 빨리 가려고 했습니다. 번호가 떴어요. 판사요. 조사해보니 아이가 있더군요. 저는 아이를, 쇼는 판사를 맡으러 가기로 했어요.”
“그럼 안가고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죠?”
해롤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이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수많은 감시 카메라와 병원 관리자가 득실거려 위험 요소가 적은 자기나 보러오다니.
“리스씨-”
“다 필요 없으니까요.”
“네?”
“당신이 없다면 누가 죽던 상관 없으니까요.”
짐승의 것처럼 빛나는 존의 갈색 눈동자가 해롤드를 주시했다. 마치 굶주린 맹수가 지금이라도 잡아먹을 수 있는 먹이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언제부터 저런 눈빛으로 보고 있었을까.’
해롤드는 뒷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라도 사냥당해 마땅한 느낌이었다. 우선 그를 진정시켜보려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자신의 입과 코를 감싸오는 존의 손수건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뒷목을 쓸어내리며 약간의 힘을 줘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림자가 드리우러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차가워 보이는 그의 눈동자. 마치 오래전 끝끝내 하지 못한 일을 하는듯한 눈빛이었다. 존은 이미 정신을 잃은 듯 축 처진 해롤드를 꼭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다시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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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캐한 먼지 냄새와 무언가 답답한 느낌에 눈을 뜬 해롤드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 위를 무언가가 가로막는 느낌이었지만 놀란 해롤드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앉아있는 바닥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두 팔은 차가운 철제 기둥 같이 느껴지는 곳에 묶여 있었고 다리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심하게 다뤄진 것인지 겨우겨우 났기 시작한 상처들이 다시 벌어져 해롤드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극심한 고통에 덜덜 떨고 있는 해롤드는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규칙적으로 또각또각- 하고 걸어오는 소리가 해롤드의 정신을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려 생각하기 시작했다. 불안해 보이는 걸음걸이가 아닌 것을 보니 아마 납치범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나 가까운 곳에서 그 사람의 발소리 멈췄을 때 해롤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정보도 줄 생각이 없습니다. 차라리 죽이세요. 시간 낭비만 할 테니까요.”
중간중간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와 우스운 꼴이 됐지만 해롤드는 자신의 의사만 전해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해롤드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굽혀져서 움직이지 않는 무릎 바로 앞에 그것의 손가락처럼 느껴지는 것이 닿았다. 한동안 정적만이 돌았다. 그것이 자신을 구석구석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해롤드는 존이 생각났다. 만약 지금이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그렇게 매몰차게 굴지 말걸. 마지막으로 고백이라도 할 걸. 사랑한다고, 당신을 위해서 하면 불에 타 죽는 경험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해줄걸.
“내가 당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익숙한 목소리가 해롤드의 귀를 간지럽혔다. 낮지만 가벼운듯한 그의 목소리가 해롤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존..?”
“그래요, 해롤드.. 나에요. 내가 누군지는 알겠어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해롤드는 만약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존이라면 왜 저런 질문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당연히 안다고 말을 해줘야 하는데,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하는데 말하는 족족 발음들이 뭉개져 알아들을 수 없게 됐다.
“쉿… 걱정하지 마요, 해롤드. 이제 내가 지켜줄게요. 당신이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요. 그럴 때마다 내가 누군지 상기시켜주면 되니까… 그러니까 해롤드… 걱정하지 마요..”
해롤드는 존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알 길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그의 존재를 한동안 잊은 것처럼 말했다. 해롤드는 존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울음소리에 눌려 나오지 않았다. 존이 해롤드 안대를 벗겨주자 해롤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존은 온데간데없고 처음 보는 사람이 눈앞에 놓여있었다. 해롤드는 그 상황을 벗어나려 발버둥쳤지만, 그 사람에 의해 저지됐다. 그 사람은 해롤드를 진정시키려 해롤드의 볼을 쓰다듬었지만,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그 사람의 손끝이 자신에게 닿을 때 해롤드는 속이 뒤집혀지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을 유리그릇 다루듯 섬세하게 움직이는 그 손길이 역겨웠다. 해롤드는 점점 정신이 희미해 지는 것을 느꼈다. 해롤드는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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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 해롤드는 좀 어때요..?”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롤드는 좋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됐다. 사실 해롤드가 제정신을 유지하는 날은 별로 없었다. 판사의 아이를 구하려다 되려 납치된 해롤드는 극악무도한 짓을 당해야만 했다. 오직 육체적 고통에만 의존한 구세대적 고문이었다. 해롤드는 이틀에 한 번꼴로 정신이상에 시달렸다. 그때의 해롤드는 마치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는 것 같았다. 10년, 20년 전의 과거가 아닌 그보다 더 먼, 전생과 현재를. 존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아 헤맸지만, 막상 존을 마주했을 땐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땐 어제의 행동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듯 행동했다. 또한 마치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하루는 존에게 다른 사람들이 우릴 보고 욕한다며 울며 호소했지만 아무리 감시 카메라를 돌려봐도 해롤드의 병실 앞에서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은 없었다. 해롤드가 사람을 극도로 혐오하자 의사는 해롤드를 안전가옥으로 옮기는걸 추천했다. 옮기는 와중에 해롤드가 탈출을 감행했고 그를 진정시키려다 상처가 벌어졌다. 하지만 리스는 해롤드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날이 가면 갈수록 해롤드는 존에게만 의지했다. 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존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해롤드를 꿈꿔왔다. 그러니, 해롤드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둘은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